식물공부를 시작하고도 아주 오랫동안 나는 이 나무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 지 못한 채 그저 산에서 자라는 평범한 나무의 하나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연구실 뒤편 숲길을 걷다가 꽃을 막 피우기 시작한 팥배나무를 만났다.
그 단정하고 순결한 백색의 꽃잎, 막 피어나 연하고 순한 진한 연둣빛 아니 연한 초록빛 잎새의 주름…. 그 맑은 아름다움을 제대로 몰랐다니. 그때의 고백이 떠올라 지금까지 눈여겨 보지 않았던 무심함에 나 스스로 많이 후회했다.
팥배나무는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성 활엽수다. 다 자라면 15m나 되는 큰키나무이다 우리나라에선 어느 산에 가더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여러 나무가 모여서 자라길 좋아하고 햇빛이 부족하여도 잘 견딘다. 추위에 아주 강하고 게다가 땅이 비옥하지 않은 곳에서도 끄떡없는 나무이다.
왜 팥배나무란 이름이 붙었을까. 배꽃처럼 하얀 꽃이 피어 배나무가 되었고 그중에서도 배처럼 크지 않고 팥처럼 작은 열매를 가졌기에 그리 이름이 붙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늦은 봄에 10개에 가까운 꽃들이 부챗살을 펼쳐 놓은 듯 둥글게 모여 달리고 가을에 익어가는 열매는 겉모양이 찔레나 앵두의 열매를 보는 듯 작고 둥글고 붉지만 그 속을 잘라 보면 배의 구조와 더 비슷하며 표면에는 흰 점이 많이 나있다.
팥배나무 열매는 아주 선명한 붉은 색인 데다가 잎은 따서 붉은색 염료로 썼다는데, 이 나무를 심어 얻은 이익이 뽕나무보다도 높았다는 기록도 있다.
지방에 따라서 강원도에서는 벌배나무 또는 산매자나무, 전남에서는 물앵도나무, 평안도에서는 운향나무, 황해도에서는 물방치나무로 불렀다고도 한다. 한자로는 감당(甘棠), 당리(棠梨), 두(杜) 또는 두리(豆梨, 杜梨)라고도 하는데 역시 배나무와 많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팥배나무 열매를 배처럼 먹지는 않는다. 물론 먹을 수도 있고 해가 되지도 않지만 간혹 무료함에 따서 먹어보아도 별 맛을 느낄 수가 없다.
그러나 숲속에 사는 새와 짐승들에게 좋은 먹이가 되어 주므로 이 열매는 사람들에게 직접 붉은 열매를 보는 즐거움 외에 열매를 찾는 새들을 볼 수 있는 기쁨까지 덤으로 준다. 또 꽃이 피는 계절에는 깊고 풍부한 꿀샘을 찾아 많은 벌들이 날아 오니 이 또한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하여, 팥배나무를 ‘3락(樂)의 나무’라고 일컬어도 좋을 듯하다.
팥배나무의 목재는 비교적 무겁고 단단하며 잘 갈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몇 해 전이었는데 봄이 지나가고 더위가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할 무렵, 남산의 식물들을 조사하다가 초록빛 숲을 아래로 두고 파란 하늘을 배경삼아 흐르는 구름을 보는 듯 환하게 꽃을 피운 늘씬한 나무를 보았다.
도심의 공해에 병들어 간다는 남산에 저토록 밝은 모습으로 우리를 보고 있는 나무가 무엇일까? 바로 팥배나무였다. 잘 자란 팥배나무의 꽃 그늘은 서울 시민들의 휴식처로 넉넉하고 정결해 보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새로운 가로수로 좋을 나무를 추천하라고 하면 나는 언제나 팥배나무가 먼저 떠오른다. 강하고 아름다운 이 나무를 늘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가슴이 붉게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