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est 소셜 기자단 -/2017년(8기)

백골산에서 느끼는 백제와 신라의 숨결, 대전 백골산 산행기

대한민국 산림청 2017. 12. 14. 16:30







대전시 동구 신상동 278-2 바깥아감 마을에서 백골산 산행을 시작합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대전역에서 출발하는 63번 버스를 타고 바깥아감에서 내리면 됩니다.


바깥아감 이라는 말은 산의 형세가 물고기를 닮았다고 해서 아가미산 이라고 하면서 생긴 것으로, 산 안쪽에 있는 마을은 안아감, 바깥쪽에 있는 마을은 바깥아감이 되었다고 합니다.




길은 완만하게 시작됩니다.
길은 사진에서 보다시피 신작로 처럼 넓고 부드러운 길입니다.
첫번째 낙엽길은 솔잎 이네요.
솔잎이 부드럽게 깔려 있는 소나무 구간입니다.




800미터 지점을 통과하고 있는데, 여전히 길은 편안 합니다.
등산화가 아니라 운동화만 신고와도 충분히 산행을 할 수 있는 정도 입니다.
가을 낙엽을 만끽하며 부드럽게 고도를 높혀 가는 길 이렇듯 초입은 산성 같지 않게 경사도가 완만 하네요.




이렇듯 부드러운 산에 어울리지 않는 '백골' 이라는 험한 이름에 대한 이야기는 천년 이전의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결론적으로 끝난 신라의 삼국통일, 그리고 그 통일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여러가지 사건과 전투들 가운데, 이곳 백골산과 바로 옆의 고리산의 이야기는 빼놓을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강살봉 (335m)

부드럽던 산길이 강살봉에 가까워지면서 경사가 점점 급해집니다. 아무리 찾아봐도 강살봉을 한자로 표기해 놓은 것이나, 이름에 대한 유래를 알 수 있는 자료를 찾을 수가 없네요. 백골산 이라는 산 속에 있는 봉우리 '강살'. 결코 이름이 범상치 않습니다. 이곳에 강(江)도 있고, 죽음(殺)도 있기에 강살봉 이라는 이름에도 분명히 사연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강살봉에서 바라본 고리산 (환산)

이곳 백골산에 대한 이야기를 알려면 먼저 저 앞에 있는 고리산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두 산은 그만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백제 말기 신라와의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산 입니다. 고리산에서의 문제가 결국 이곳이 백골산 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영향을 끼치게 되었지요. 역사적으로 하나의 스토리 안에 있는 산 인데, 이렇듯 백골산에서 고리산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정도가 고작 이정도 라는게 아쉽기만 하네요. 적어도 한군데 정도는 고리산이 온전히 보여질 수 있는 조망터가 있으면 좋을 텐데요.




그럼 이제 백골산의 유래와 이름에 관련된 옛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의 계기와 기틀이 된 중요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백골산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 - 1

5세기 중엽 고구려의 남하정책때 신라와 백제는 동맹을 맺고, 6세기 성왕때 이르러서 충분한 힘을 갖추게 되자 신라와 힘을 모아 고구려에 빼앗긴 고토 회복을 시도 합니다. 그리하여, 백제는 서울, 경기지역의 옛 땅을 회복하고, 신라는 충북, 강원지역을 얻게 되는데, 신라가 고구려와 밀약을 통한 배신으로 백제가 회복한 서울, 경기지역의 노른자 땅을 다시 빼앗아 버리게 됩니다.


이렇듯 진흥왕에게 배신을 당한 성왕은 분노를 참고, 신라군을 공격하는 대신에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을 보내며 복수의 그날을 계획하다가 가야, 왜국과 연합하고 신라를 공격하는데, 그곳이 바로 백골산 근처에 있는 충북 옥천입니다. 백제는 태자인 부여창을 연합군 사령관으로 삼아 고리산과 백골산 일대에 진영을 구축하고, 성왕은 인근의 성치산성에 성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양국 힘의 균형은 백제 연합군에 기울어진 상태였구요. 그런데 이때 뜻밖의 큰 변수가 등장을 하게 됩니다.


어느날, 백제 연합군 최전방인 고리산에 머물며 연합군을 지휘하던 태자 부여창이 몇일 앓아 눕게 되는데, 이 소식을 접한 성치산성의 성왕이 아들을 위문하러 가게 됩니다. 신라를 가볍게 보던 사자같은 백제의 성왕이 고작 50여명의 신하들만 데리고  태자를 위문 가다가 구진베루 라고 하는 구천 한가운데서 미리 첩보를 입수하고 잠복하던 신라기병에게 잡히게 됩니다. 그렇게 전장을 호령하던 성왕과 수뇌부들 50명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이게 됩니다. 말 그대로 어이없는 비명횡사를 하게 된 것이죠. 이렇게 백제 연합군은 구심점인 성왕을 잃고 전장의 흐름을 신라에 넘겨주게 됩니다.




백골산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 - 2

성왕은 죽은 후에도 대세에 큰 영향을 끼치는데, 먼저 신라군이 성왕을 잡았을때 말을 관리하는 노비에게 왕의 목을 베게 하는 모욕을 주고, 둘째는 그 목을 신라로 가져가 경주의 관청인 북청의 계단 밑에 묻어 두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밟고 지나다니게 했다고 합니다.


이후 자신 때문에 부왕을 잃게 되었다는 생각과 부왕의 죽음 그리고 주검과 관련된 신라의 예를 벗어난 상식적이지 못한 행태에 이성을 잃은 태자는 수만의 기병을 몰아 옥천의 관문인 관산성을 공격하였는데, 결국 대패를 하고 그곳에 말무덤 이라는 지명까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성왕도 잃고, 기병도 모두 잃고 지지부진 하던 백제 연합군에 치명적인 타격이 가해집니다. 최전방 고리산성과 바로 뒤에 있는 백골산성은 좁아서 대규모 병력이 상주할수 없기에, 대부분의 병력들은 고리산과 백골산 사이 그리고 백골산 뒤쪽의 대청호 수몰 이전의 금강변 평야지대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신주에서 고구려를 상대하던 신라북쪽 최전방을 지키던 김무력 장군의 대규모 기병부대가 고구려의 협조로 비밀리에 남하하여 전혀 방비가 없던 연합군 후방을 급습하게 되었고, 관산성에 있던 신라 주력군도 이에 대응하여 앞 뒤로 신라군에 쫒긴 군대가 이곳 백골산에서 전멸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만명의 백제병사가 이곳에서 죽게되어 백골이 산을 이루었다고 해서 백골산 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백제와 신라의 균형추는 급속히 신라에 기울게 되었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는 기틀을 마련해 줍니다.




이렇듯 백골산과 고리산은 하나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진으로 보이듯, 백골산에서는 잡목에 가려 고리산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점이 못내 아쉽습니다. 그 예전엔 저 산과 이 산 사이에도 수많은 야전 막사가 세워지고 병사들로 가득 했겠지요.




충북쪽 산에 가보면 바위와 어우러지며 마치 여인의 아름다운 춤사위나, 선비의 고고한 멋이 생각나는 소나무 가지들의 유려한 몸짓을 볼 수가 있는데, 이곳 백골산의 소나무들은 사진에서 보듯 거칠고, 투박하고 억세기만 합니다. 마치 오래전 그 옛날에 이곳에서 죽어간 백제 병사들의 한과 기상이 나무에 깃들어 있는듯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백골산에 얽힌 오래전 옛날의 이야기를 생각하며 살방살방 걷다보니 어느새 정상입니다.





백골산 정상에서의 조망은 이정도 입니다.
잡목에 가려서 시원한 조망은 어렵지만, 대신 근처에 멋진 조망터가 있지요.




태봉정 방향으로 몇 미터 가다보면 이렇게 묘지가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백골산 최고 조망터입니다.




백골산성 조망터에서 바라본 대청호 풍경입니다. 꽃님이 반도라 불리우는 방축골이 보입니다. 대청호를 내려다 보는 조망은 조금전 언급한 옆 산인 고리산에서 내려다 보는게 훨씬 낫지만 백골산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대청호 풍경도 가히 절경입니다.


오래전 당시는 호수 건너편 쪽으로 아름다운 금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었을 테구요, 이쪽으로는 마을과 논밭, 그리고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을 겁니다. 대청호가 만들어지기 전에 이곳에 드넓은 백사장이 있는 그림같은 천연 금강 수영장이 있었답니다.




백골산성의 흔적

천년이 넘는 세월에 산성은 무너져서 백골 이라는 이름과 더불어 패망한 백제의 모습을 보는듯 합니다.




태봉정을 향해 내려서면 갈림길이 나옵니다.
사진속 계단을 따라 태봉정으로 올라서도 되고, 오른쪽으로 바로 내려서도 됩니다.
두 길은 결국 산 아래 입구에서 만나게 되니 어느 길을 택해도 됩니다.

한쪽에 서있는 만든지 오래되어 보이는 이정표에는 태봉정 방향으로 '경치좋은곳' 이라고 표기해 놨는데, 이정표를 만들때는 그랬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잡목으로 인해 태봉정에 올라서도 아무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대청호 오백리길 팻말은 양쪽으로 붙어 있습니다.
다만, 노루귀가 피는 이른 봄 철에는 오른쪽 길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곳 백골산에 여러번 온적이 있는데, 바로 이곳에 자생하는 노루귀를 만나러 왔었습니다.
노루귀 군락지는 이곳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서다 보면 있습니다.
밟지도, 캐지도 마시고 조심히 보고만 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노루귀 길은 많이 다녔던 지라 오래간만에 태봉정으로 올라섰습니다.
사진에서 보는바와 같이 태봉정 주변의 잡목으로 인해 '경치좋은곳' 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되었습니다.




태봉정에서 내려가는 길은 낙엽이 두툼하게 깔린 푹신한 비단길 입니다.
산 이름과 달리 길도 편하고 좋네요.




백골산을 내려서면 바로 만나는 유명한 곳이 한식마을의 맛집 '진고개식당' 입니다.
원점회귀 산행을 원한다면 바로 진고개식당을 들머리로 삼으면 됩니다. 진고개식당 앞에 공터가 있는데, 백골산을 산행 하시는 분들이 이곳에 차를 세워두기 좋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있었던 옛 일들을 상상해 보면서 그 옛날 백제군의 슬픔과 한이 서린 백골산을 걷는 것은 분명 대청호 오백리길의 이 구간의 명칭인 ‘백골산성낭만길’의 이름처럼 낭만적인 길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땅, 두 나라의 흥망이 걸렸던 중요한 역사현장을 당시를 생각하며 걷는 것은 분명 또 다른 느낌이 전해오는것 같습니다.





※ 본 기사는 산림청 제8기 블로그 기자단 전문필진 박재성 기자님 글입니다. 콘텐츠의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내손안의_산림청,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