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흰 눈이 가득 내리고 차가운 겨울 바람은 두 뺨을 발갛게 만든다. 찬기운이 그다지 싫지는 않다. 국수를 파는 아들과 우산 파는 아들을 둔 어머니처럼, 날씨가 추우면 어려운 사람들이 걱정이 되고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면 생태계에 불균형이 생기지나 않을까 이래저래 걱정이 꼬리를 문다. 흐르는 세월의 빠름에 가슴이 덜컹하다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새로운 계절을 생각한다.
자란도 그래서 생각나는 식물이다. 자생지에서 피어나는 제 계절은 봄 하고도 한참 늦은 봄이지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자란은 제 고장에서는 찾기 어렵고 기껏 온실 속에서 자라 꽃시장에 나온 것들이고 보면 이른 봄에 가장 먼저 반길 수 있는 우리 꽃이 아닐까싶다.
우리가 온실에서 가꾸는 자란만을 만날 수 있는 이유는 우선 이 식물의 자생지가 남쪽이므로 중부지방에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나마 군락을 지어 자라는 대부분의 자생지는 무분별하게 남채되어 남아 있는 곳이 드물기에 우리가 우연히 산야에서 만나기란 정말 쉽지 않은 꽃이다. 그래도 많이 재배되어 커피 한 잔 값이면 한 촉을 구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아예 자생지는 넘보지도 말고 그냥 보고 싶으면 꽃시장에 가서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자란을 구입하면 된다. 집에 두면 연자주빛의 꽃잎이 은근히 화려하여 눈길을 모으는 예사롭지 않은 식물이다.
자란은 난초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풀이다. 다소 습한 지역에서 자라는데 봄에 바깥 기온이 섭씨 15도를 넘어 가면 구경이 형성되고, 잎을 보내고 꽃을 올린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잎은 5~6장 정도 길게 자라고 그 사이로 올라온 꽃자루에 3~7개의 꽃이 달린다. 꽃잎 가운데 유독 순판의 빛깔이 연하고 주름져 있는데 다른 꽃잎의 밝은자줏빛과 어울린 모습이 여간 곱지 않다.
홍자색 꽃잎을 가졌다고 해서 자란(紫蘭)이라고 부른다. 한방에서는 백급(白芨)이라는 생약명을 쓰고, 그밖에 백근(白根), 백급(白給), 자혜근(紫蕙根), 또 붉을 주(朱)자를 써서 주란, 대암풀이라고도 불린다.
자란의 대표적인 용도는 역시 원예용이다. 자란을 상품으로 개발한 역사가 오래이다보니, 잎에 복륜이 있는 ‘albomargonata(흰줄자란)’, 백색 꽃이 피는 ‘albiflora(백화자란)’ 등 몇 개의 품종이 시중에 나와 있다. 자란은 한아름 분식하면 아주 보기 좋고, 따뜻한 곳이나 실내 정원에서는 화단에 심기도 한다. 특히 낙엽성 교목의 하층에 지피용으로 심으면 이른 봄에 화려한 꽃을 즐길 수 있다.
덩이줄기를 뿌리와 함께 쪄서 말려 약으로도 사용한다. 수렴지혈작용이 있어 폐에 고름이 있거나 위장출혈, 코피 등에 효과가 있다. 그밖에 창상, 습진, 악성종기와 같은 외과적 질환에도 사용한다. 일본에서는 곱게 간 약제를 바셀린 등과 섞어 화상이나 동상, 손발이 튼 데 바르기도 한다.
가끔 남쪽에서는 사라진 줄 알았던 자란의 자생지를 찾았노라는 소식이 들려오곤 한다.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져 보물찾기처럼 찾아낸 정말 보물 같은 장소이다. 그런 곳들이 다가오는 봄엔 남도의 이곳저곳에서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유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rest.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