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끝나자 여름이 거침없이 본색을 드러낸다. 한낮에는 기온이 30도를 넘나드는 숨 막히는 날씨. 이런 날 산행을 한다면, 더구나 피서를 위한 산행이라면 어디 강원도의 심심유곡 계곡물이 흐르는 산속을 찾아가나 보다 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서울도심 속의 산 북악산. 이 산을 오르는 길은 다양한데 여름에 걸어 오르기 좋은 산행길은 딱 한 코스뿐이다.
숨숨 턱턱 막히는 더운 여름날, 시원한 얼음방석 같은 바위에 주저앉아 상쾌한 계곡물에 발을 담가가며 쉬엄쉬엄 오르는 산행의 즐거움. 날씨가 무더울수록 햇살이 뜨거울수록 쾌감이 커지는 이런 느낌은 미천골, 아침가리골 같은 멀리 강원도 오지 산골에 가야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북악산의 맑고 깨끗한 냇물이 흘러 내리는 동네 종로구 홍지동의 세검정에서 출발하여 믿기 힘들게 청정한 백사실 계곡을 거쳐 멋진 전망대이자 쉼터인 팔각정이 있는 북악산 하늘길을 걷는 산행길이 그런 곳이다. 명색이 산행이지만 물을 가득 채운 수통과 김밥 두 줄, 교통카드 한 장만 있으면 되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한 길이다.
세검정
세초(洗草)를 했던 세검정 너럭바위
버스를 타고 세검정 정류장에서 내려 가까이에 있는 세검정(洗劍亭) 정자를 향해 걸어갔다. '칼을 씻는 정자'라는 뜻의 한자 이름을 보니 평범한 정자가 아니다. 이곳은 조선 영조 24년(1748년)에 세운 것으로, 인조 반정 때 거사 동지인 이귀·김유 등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 폐위 결의를 하고 칼을 씻었다 하여 이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세초(洗草)는 원고지를 씻는다는 뜻으로, 조선왕조실록 편찬에 사용되었던 사초(史草)와 원고들의 누설을 막기 위한 작업을 말한다. 간혹 불태우기도 했으나 보통은 종이를 물에 씻어 글자는 지워버리고 종이는 재활용했다. 세검정 인근에 종이 만드는 일을 담당하던 국가기관인 조지서(造紙署)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종이를 다시 쓸 수 있게 재생산했다.
정말 세검정 앞에서 세초를 했음직한 평평하고 널찍한 너럭바위가 자리하고 있다. 세검정 앞에 안내 글과 함께 정자와 주변 풍경이 펼쳐진 겸재 정선의 부채그림 <세검정>이 전시돼 있다. 세검정은 1941년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으나, 겸재 정선이 그린 그림을 바탕으로 1977년에 복원하였단다. 겸재 선생의 세검정 그림을 보니 지난 세월만큼이나 주변 풍광이 참 많이 달라졌다.
한양도성 성곽이 이어진 북악산
세검정 주변 마을 풍경
세검정을 지나북악산 자락의 작은 동네로 들어서자 발아래로 냇물이 흘러간다. '인간을 구제한다'는 뜻을 지닌 홍제천의 상류다. 내가 사는 동네의 불광천과는 차원이 다른 맑은 물이 흐르는데 서울이 아닌 멀리 시골 마을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번잡한 도심 종로구에서는 느낄 수 없는 수수함이 묻어나는 동네 풍경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단층의 어느 집은 담벼락에 호박, 토마토를 키우고 있어 절로 미소가 번졌다. 가게 앞에 앉아 가고픈 평상이 있는 작은 슈퍼와 마주쳤는데 이름이 '자하 슈퍼'다. 그 옆에 있는 다세대 주택 이름은 '자하 주택'. 부암동엔 창의문이라는 조선시대 성문이 있는데 별칭인 자하문을 따라 지은 이름들이 많다.
자하슈퍼를 지나면 길 오른쪽 골목 입구에 '불암(佛岩)'이라는 글자가 한자로 새겨진 바위가 있다. 이 부처님 바위를 끼고 골목길 위로 올라가면 부암 어린이 집이 보이고 비로소 골목을 벗어나 북악산으로 오르게 된다. 매끈하고 커다란 바위와 그 위로 미끄러지듯 콸콸 흐르는 물소리가 곧이어 계곡이 나타날 것임을 알려준다. 세검정 버스 정류장에서 채 30분도 걷지 않았는데 이런 풍경을 만나다니 '여기가 서울시 종로구 맞나?' 혼잣말을 하게 한다.
서울시 생태경관보존지역인 백사실 계곡
도롱뇽, 멧돼지가 사는 두메산골
집들과 절이 있는 동네를 벗어나 작은 오솔길 같은 산 들머리에 들어서자 나무에 붙여 놓은 안내 팻말이 맞아준다. '산에 멧돼지가 살고 있으니 주의 바람' 300여 미터의 높지 않은 산에 무슨 멧돼지가 살까? 했으나 수백 년된 나무들로 울창한 초록의 숲속에 들어서자 멧돼지보다 더한 짐승도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장마 전이라 가물었을 텐데도 계곡물이 끊기지 않고 숲속 가득히 맑은 물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더운날 등산화 속에서 힘들었을 발을 꺼내 흐르는 물속에 담그니 모두들 혀를 내두르던 폭염과 뜨거운 햇살이 그만 스르르 용서가 된다. 물속에는 작은 송사리들이 단체로 돌아다니고 올챙이 같기도 하고 도롱뇽 같기도 한 작은 발이 달린 귀여운 물짐승이 신기해 가만히 관찰하며 1급수 물이 흐르는 계곡에 앉아 쉬어간다.
이곳은 '백석동천(白石洞天)'으로 불리는 곳인데 '백석'은 '백악' 즉 '북악산'을 말한다. '동천'이란 경치가 아주 뛰어난 곳에 붙이는 자구로 이곳이 옛 부터 알아주던 절경이었다는 표시다. 그러니 '백석동천'은 '북악산에 있는 경치 좋은 곳'이 되겠다. 주민들 사이에는 옛 부터 '백사실 계곡'이라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주변 환경에 따라 몸 색깔을 바꾸는 무당개구리
옛 선인이 바위에 새겨놓은 글자 ‘백석동천’ - 북악산의 경치 좋은 곳
백사실 계곡은 생태경관보전지역이기도 하다. 숲으로 둘러싼 계곡 길을 걷다보면 눈에 띄는 동물이 있는데 바로 무당 개구리. 우거진 숲과 맑은 물이 있어선지 셀 수도 없이 많은 무당 개구리들이 살고 있었다. 등과 달리 배는 주황색으로, 피부색이 알록달록해 마치 무당 옷을 입은 것 같다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단다. 주변 환경에 따라 색을 바꾸는 특별한 피부이기도 하다. 독특한 외모만큼이나 생명력도 강해서 최장 20년을 산다고.
마치 강원도의 어느 두메산골에 들어온 것 같은 깊은 숲과 계곡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별 노력도 없이 이런 숲속에 들어오니 괜히 미안하고 심신이 호강하는 기분이다. 숲속의 옹달샘 같은 아담한 연못가에 서서 연못 속에 잠긴 고요한 산속 풍경을 감상했다. 들리는 건 물소리와 새소리, 살랑살랑 불어오는 싱그러운 바람소리뿐이다. "아! 좋다." 조용한 감탄이 흘러나왔다. 차량들이 북적이는 서울 도심이 코앞인데 공기가 이렇게 깨끗하다니...
북악산 꼭대기 쉼터 팔각정
북악산 팔각정에서 보이는 전경
숲속 오솔길은 얼마 후 북악 하늘길이라 불리는 북악산로(북악스카이웨이)를 만난다. 북악스카이웨이는 남산 순환로처럼 북악산에 난 차도다. 1968년 1월21일 북한 무장간첩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하기 위해 이 산을 타고 청와대 부근까지 침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시는 수도 방어와 관광을 목적으로 하는 북악스카이웨이를 건설한다. 차도 옆에 만든 산책로를 걷다보면 전망 좋은 곳에 서있는 북악팔각정이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며 여행자를 반긴다.
#내손안의_산림청,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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