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기는 산림청/꽃과 나무

여인이 봉선화 물들이기를 했던 이유

대한민국 산림청 2009. 10. 16. 17:24

 

봉선화 물들이기는 손톱을 아름답게 하려는 여인의 마음의 표현이면서 아울러 붉은빛이 벽사의 뜻이 있으므로 병마와 악귀로부터 몸을 보호하려는 민간신앙의 의미도 포함돼 있다.

 

봉선화(봉숭아)하면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노라.'라는 가사의 가곡「봉선화」이다. 이 가곡에서 봉선화는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정겹고도 한을 달래는 꽃으로 그려졌다. 이로써 봉선화는 조국의 광복을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담은 꽃이자 노래의 소재가 됐다.

 

봉선화 꽃물은 규방여인과 인연 묘사


또 다른 노래는 조선시대의 가사로 알려진 「봉선화가(鳳仙花歌)」다. 작자와 연대가 미상인 이 노래는 봉선화 꽃의 이름에 대한 유래와 그 꽃으로 손톱에 물들이는 풍습 등을 여인의 감정과 연관시켰다. 이 노래는 『정일당잡지(貞一堂雜誌)』에 실려 있어 작자가 조선 헌종 때의 정일당 남씨(南氏)라는 설도 있고, 허난설헌의 문집에 실린 「염지봉선화가(染指鳳仙花歌)」와 「선요(仙謠)」 등의 대목과 부분적으로 일치하거나 분위기가 비슷한 점을 들어 허난설헌의 작품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허난설헌의 작품은 봉선화 꽃을 물들인 아름다운 손톱의 묘사로 일관되고 있는데 비해 이 작품은 봉선화를 통해 여인의 한과 그리움, 인연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약간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작품은 봉선화라는 이름의 유래를 독백체 문답형식으로 노래하며 시작했다. 즉 한 여인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이때 여인은 지상에서의 인연을 이 꽃에 머물게 했으며, 잎은 봉의 꼬리 같고 꽃은 신선의 치마를 펼친 듯해서 봉과 선을 합하여 그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춘삼월에 봉선화를 심는 일 등을 그렸고, 길쌈을 끝낸 여름밤에 일하는 소녀와 함께 손톱에 봉선화 꽃물을 들인 일, 다음날 봉선화 꽃물 든 손톱의 아름다움, 봉선화 꽃과 손톱의 빛깔을 비교해 보는 모습을 노래했다. 또한 꿈결에 한 여인이 작별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꽃귀신인 것 같아 급히 나가보니 땅 위에 봉선화 꽃이 가득 떨어졌음을 본다. 이를 애석하게 여기면서 봉선화는 다른 꽃과 다르게 여인의 손 위에 오래 남아 절조를 나타낸다고 노래했다. 그리고 작품의 종결부에서는 규방여인과 봉선화의 인연을 그렸고, 복사꽃과 살구꽃 등 모든 꽃은 떨어지지만 이 봉선화만은 꽃이 진 뒤에도 규방 깊숙이 여인의 손톱에 남아 그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고 노래했다.

 

대부분의 내방가사가 여성으로서 지켜야 할 수신 윤리와 규방에서의 한을 읊은데 비해 이 작품은 독특하게 비교적 밝은 분위기로 여성 고유의 섬세한 감정을 잘 드러냄과 아울러 아름다운 정서를 노래했다. 또한 조선시대 여인들의 정서생활을 모티브로 하면서 규방에 갇혀 화초와 벗을 삼아 꿈을 키우던 여인의 상황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는 점도 돋보인다. 특히 봉선화를 통한 조선시대 규방여인의 인연을 주제로 하는 이 노래는 그 소재로서 봉선화 물들이기를 내세웠다.

 

병마를 막거나 아름다움, 사랑 상징해


봉선화 물들이기는 앞선 노래뿐만 아니라 민간 전래의 설화에도 등장할 정도로 유명하다. 그 풍속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봉선화 물들이기의 시작은 귀신을 쫓아내는 무당의 손톱에서 비롯됐다. 조선시대 이유원(李裕元)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봉선화가 붉어지면 그 잎을 쪼아 백반을 섞어 손톱에 싸고 사나흘 밤만 지나면 붉은빛이 짙게 든다하고 무당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이 봉선화물을 들이는 뜻은 예쁘게 보이려는 것보다 병마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고증했다. 이는 봉선화 꽃의 붉은 빛깔이 못된 귀신의 침입을 막아준다고 믿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와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실제로 봉선화의 냄새는 뱀이나 벌레들을 물리칠 수 있단다. 금사화(禁蛇花)라는 별칭도 뱀이 못 들어오게 막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봉선화 물들이기는 꽃과 잎을 조금 따서 백반과 함께 돌이나 그릇에 놓고 찧는다. 백반이 없을 때는 신맛이 있는 ‘괭이밥’이라는 풀잎을 백반 대용으로 이용했다. 이것을 손톱에 붙인 뒤 헝겊으로 싸고 실로 총총 감아 하룻밤을 자고 난 다음날 풀어보면 손톱이 곱게 물들어 있다. 백반과 괭이밥 잎은 착색을 잘 시키고 빛깔을 더 곱게 해준다.


따지고 보면 이 풍속은 손톱을 아름답게 하려는 여인의 마음과 아울러 붉은빛이 벽사의 뜻이 있으므로 병마와 악귀로부터 몸을 보호하려는 민간신앙의 의미도 포함돼 있다. 또한 8월에 봉선화 물들이기를 하는 시누이의 집에 시집가면 시집살이를 하고, 손톱의 봉선화물이 첫눈 올 때까지 지워지지 않으면 첫사랑이 성공한다는 속설도 전한다.

 

소녀의 설움과 조국산천의 그리움 표현


전래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봉선화 꽃의 이름은 봉선(鳳仙)이라는 궁녀의 이름에서 유래됐다는 설과 봉선이란 신선의 이름에서 유래됐다는 2가지 설이 있다. 고려 충선왕 때였다. 충선왕은 몽골(몽고)에서 보내온 공주보다 다른 여인을 더 사랑했다. 때문에 충선왕은 당시 고려를 지배하던 몽골의 미움을 받아 몽골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충선왕은 한 소녀가 악기로 연주하는 꿈을 꾸었는데, 소녀의 손가락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왕은 기이하게 생각해 궁궐에 있는 궁녀들을 모두 조사해 보았다. 그랬더니 한 소녀가 열 손가락에 하얀 천을 실로 꽁꽁 동여매고 있었다.

 

소녀는 고려에서 끌려온 공녀(貢女)인데 조국의 고향집이 그리워 울다가 너무 울어서 눈병으로 거의 장님이 될 지경이라고 했다. 열 손가락을 동여맨 것은 자신의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봉선화로 손톱에 꽃물을 들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소녀는 아버지가 충선왕을 충심으로 섬기는 신하였기에 관직에서 쫓겨났다는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왕은 소녀의 이야기를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이란 것을 안 충선왕도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왕은 원나라 무종이 왕위에 오를 때에 크게 도와준 공으로 마침내 고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려로 돌아온 충선왕은 얼마 안 있어 몽골에서 만났던 갸륵한 소녀를 불러오려 했으나 소녀는 이미 죽은 후였다. 왕은 소녀를 기리는 뜻에서 궁궐 뜰 앞에 많은 봉선화를 심게 했다. 한편 이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옛날 어떤 여인이 선녀로부터 봉황이라는 한 마리 새를 받는 꿈을 꾸고 딸을 낳아 봉선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곱게 자란 봉선은 천부적인 악기 연주 솜씨로 그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임금님 앞에서 연주하는 영광까지 얻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소녀 봉선은 갑자기 병석에 눕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님의 행차가 집 앞을 지나간다는 말을 들은 봉선은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힘을 다해 악기를 연주했다. 이 소리를 알아보고 찾아간 왕은 봉선 소녀의 손끝에 붉은 피가 맺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매우 애처롭게 여겼다. 그래서 왕은 신하를 시켜 주변에 피어 있는 붉은빛의 꽃잎과 백반을 섞어 무명천으로 소녀의 손끝을 동여매주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봉선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죽고 말았는데, 그 무덤에서 이상스런 빨간 꽃이 피어났다. 사람들은 그 꽃잎으로 손톱을 물들이고 봉선 소녀의 넋이 화한 꽃으로 여겨 봉선화라 했단다.

 

그외에 어떤 중년 부인이 남편으로부터 부정을 의심받았다. 부인은 결백을 주장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래서 부인은 남편에 대한 항거와 결백의 표시로 자결을 하고 말았다. 그 후 부인을 묻은 무덤가에서는 부인의 넋이 봉선화로 피어났단다. 물론 이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봉선화의 형태적 특징을 기원론적으로 설명하려 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궁전에서 어떤 아름다운 여신이 절도 혐의로 조사받았다. 결국 심술궂은 신의 장난임이 밝혀져 혐의는 풀렸지만 결백한 여신은 의심을 받았다는 것 자체를 커다란 수치로 여겼고 분하고 부끄러워 자청해서 봉선화로 변신했단다. 열매가 익으면 살짝 건드려도 씨앗이 흩어진다. 그것은 여신이 지금도 무고함을 호소하는 까닭이라고 하며, 꽃말도 여기에서 유래해 '나를 건드리지 말라(touch me not)'가 됐단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봉선화 물들이기는 봉선화를 소재로 하는 노래에서 아름답고 정숙한 여인상과 인연을 상징화했다. 그리고 예전에는 병마를 물리치기 위한 퇴치법의 하나이기도 했으며, 전설에서는 조국산천의 그리움을 표상하기도 했다. 지금 울밑에 심은 봉선화는 꽃이 떨어져 열매를 맺고 있지만 산야에는 아직도 야생의 물봉선, 노랑물봉선, 흰물봉선 등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 노랑물봉선이나 흰물봉선으로 손톱을 물들여 보는 것도 이색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송홍선 민속식물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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