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통한 여인이 처벌되거나 자살할 때에 목을 매었던 나무가 자녀목(恣女木)이다. 조선시대에는 부정한 여인을 끔찍한 형벌로 다스리는 법률이 있었기에 자녀목이라는 기이한 민속이 나타났다. 또한 동료나 선배기생의 단골손님을 가로챈 기생에게는 속옷을 벗겨 비탈진 통나무에 태우고 강제로 끌어내리는 형벌도 있었다.
20여 년 전의 한국영화 이야기로 시작한다. 조선 봉건사회의 가부장적 제도에 희생됐던 여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으로, 1984년에 만들어진「자녀목(恣女木)」이란 제목의 멜로영화가 있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 살아가며 오직 순종만을 강요당하는 여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린 이 작품은 제23회 대종상·작품상·감독상·여우조연상을 수상했으며, 제1회 도쿄영화제에서는 세계영화 베스트 30에 선정되기도 했다.
줄거리를 간추려 보자. 주인공 연지는 정읍의 열녀가문 양반댁 규수로 모든 예절을 갖추면서 시집살이를 했으나 아이를 낳지 못한다. 때문에 서슬이 시퍼런 시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 연지는 시어머니의 독선과 아집에 인간의 기본 권리와 본능마저 무시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씨받이와 남편의 정사장면을 보면서도 맏며느리로서 종사를 잇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이때에 자기를 사모해 온 옛 애인이 나타나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연지는 자신이 다른 사내의 씨를 받지 않고는 뜻을 이룰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최후의 방법을 사용한다. 결국 원초적 본능의 제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옛 애인에게 몸을 허락한 연지는 시어머니에게 이 사실이 발각된다. 시어머니는 사대부로서의 명예와 체면을 손상시켰다며 연지에게 자결을 요구한다. 자신의 운명에 저항할 수 없음을 깨달은 연지는 한을 안은 채 예로부터 내려오던 부정한 여자가 목을 매는 자녀목에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한다.
이 작품은 이상한 나무이름의 자녀목(恣女木)을 제목으로 하고 있다. 이 생소한 이름의 나무는 영화를 감상하거나 우리 전통의 민속나무를 전승하거나 여인과 꽃나무의 한 단면을 이해하기 위해 그 의미를 알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자녀목은 여인의 원한이 있는 나무
우선 자녀(恣女)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국어사전에는 창녀(娼女)와 같은 뜻으로 나와 있어 그렇게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또한 조선시대의 양반집 여자로서 품행이 나쁘거나 세 번 이상 시집가서 양반집의 체면을 손상시킨 여자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여자의 경력을 적어두는 문서를 자녀안(恣女案)이라 하여 통용되기도 했다. 자녀안에 올려지면 그 가문의 명예에 관한 일뿐만 아니라 그 자손의 과거시험이나 임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단다. 따라서 자녀목은 이런 여인들의 원한이 서려 있는 나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됐다.
이 자녀목에 대해서는 간통한 여인이 처벌되거나 자살할 때에 이용했던 나무 등 많은 속설이 전한다. 그 예를 보자. 충남 홍성군 금마면에 있는 자녀목은 한동안 원죄 때문에 소란이 일어났는데, 이에 그 고을의 목사(牧使)가 나무를 베려고 톱을 대자 목사의 부인이 죽었다. 그 이후 마을에서는 처자들이 계를 모아 이 나무에 제사를 드리고 있단다. 이상하게도 이 나무에 치성을 잘 드리면 얼굴이 예뻐진다고 하니 마치 원한의 나무가 미학의 나무로 변신한 것 같기도 하다.
또한 조선 정조 때 박일원(朴一源)이 엮은「추관지(秋官志)」에 자녀목에 관한 기록이 있다. 광주의 박동질개(朴同叱介)라는 사람은 그의 아내 박소사(朴召史)가 남의 사내와 놀아난 것을 알고 가문형(家門刑)을 가하기로 했다. 먼저 마을 앞 자녀목에 묶어 놓고 할비(割鼻:자녀의 응징방법으로 코를 자르는 기이한 방법)를 했다. 할비 다음에 오른팔 왼팔 순으로 잘라 촌단(寸斷)해 죽였다. 이 처참한 사형(私刑:사적으로 가하는 제재)이 진행되는 동안 피살자인 박소사의 어머니와 오빠도 그 자리에 있었단다. 따라서 친정 식구의 입회는 바로 친정 식구와 함께 가혹한 가문형을 공모했다는 결과이다. 이는 도덕의식이 인간성이나 혈연보다 당시의 의식구조에서 한결 상위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끔찍한 형벌은 후에 악형이라 하여 금지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여인에게 통나무말타기 형벌 적용
자녀목 민속에 나타난 바와 같이 코를 베는 형벌은 주로 간음을 한 남녀에게 내리는 형벌이었는데, 로마시대와 인도에서도 있었단다. 간음을 다스리는 벌로 코를 베는 것은 동서양의 구분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형벌은 얼굴의 코와 성기를 동일시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한 사회나 집단의 윤리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성기를 암시하는 코를 베어내는 야만적인 형벌이 취해진 것 같다. 문란한 성과 관련한 형벌은 이외에도 더러 전한다. 여인과 나무에 초점을 맞춘 형벌로는 '통나무말타기'가 있다. 이 형벌은 일제강점기 때의 가혹한 체형으로, 기생들의 기적을 둔 조합에서 동료의 단골손님을 가로챘을 때에 내리는 중벌이다.
통나무말타기는 단골손님을 가로챈 기생을 비스듬히 기대어 비탈지게 한 통나무 위에 말을 태우듯 태운다. 이때 기생은 속옷을 벗긴 홑치마바람이 되게 한다. 그리고 하반라신(下半裸身)의 기생을 강제로 끌어내린다. 즉 체형의 압박으로 사타구니를 짓눌려 내리기에 고통은 물론 살을 온통 멍들게 하는 가혹한 형벌이라 할 수 있다. 만약 가로챈 손님이 선배기생의 단골이었다면 이때는 동료기생의 단골보다 더한 중형이 가해진다. 그 중형은 통나무말타기 같은 체형이 아니라 기생조합 현관에서 '단골도적'이라 쓴 표지판을 목에 걸고 하루 종일 앉아 있는 형벌이다. 한편 옛날 노량진 풍류방(風流房)에서는 남의 단골을 빼앗은 무당이 재범일 때에 그 거주지에서 추방을 당하고 초범일 때는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를 당하는 벌을 받았단다.
복사나무 나무서방으로 인식하기도
이밖에 성과 관련한 여인과 나무를 예로 보자. 예로부터 주력(呪力)적인 힘이 있어 모든 귀신을 물리쳐 준다고 믿었던 복사나무는 성모(聖母)의 생산력을 상징한다. 신라 건국신화에서 선도산(仙桃山)에 사는 지선(地仙)의 선도(仙桃)는 동국(東國)의 첫 임금이 된 혁거세를 낳았단다. 또한 나무서방은 복사나무 또는 그 열매를 여인의 사타구니에 끼고 앉아 밤을 새는 풍습이다. 나무서방은 복사나무의 열매인 복숭아를 남성의 고환으로 상징한 성기 유감주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풍습의 유래는 복사나무가 오목(五木) 가운데 정기(精氣)가 가장 좋으므로 성력(性力)을 강하게 해주는 것으로 믿는 데서 비롯됐다. 뿐만 아니라 복숭아는 그 형태와 빛깔이 여근에 비유되기도 한다.
나무시집보내기는 가수(嫁樹)라고도 하는데, 서광계(徐光啓)의 「농정전서(農政全書)」에는 정초 오시(午時)에 가수(嫁樹)를 한다고 기록돼 있다. 나무시집보내기는 벌어진 과일나무의 가지를 여성으로 보고 가지와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넣는 것으로, 성행위를 상징시켜 많은 수확을 기원하는 농경의례의 하나이다. 마치 자손의 번창이 남녀의 혼인에서 비롯되듯이 과일나무에도 이 같은 수단을 쓰면 많은 열매가 맺을 것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발상에서 유래한다. 지역적으로 보면 영동지방은 감나무를 시집보내고, 영서지방은 대추나무, 경기지방은 배나무나 호두나무에 돌을 끼운다. 전남지방에서는 나뭇가지에 옷을 만들어 입히고 '시집보낸다'고 하는데 나무에 있는 목신이 그 집에 들어 있으므로 다른 집으로 시집을 보내는 것이라 한다. 이것은 남녀간의 성교와 결혼풍습의 모방을 통해 풍작을 유도하는 연상법이다. 이쯤해서 이야기의 방향을 약간 돌려 마무리한다. 성에 대한 한민족의 의식은 고려시대에는 비교적 자유로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도경」에는 왕가에서도 재혼이 금지되지 않아 왕이 죽은 경우 왕비는 개가할 수 있었으며 왕비들 중에는 과부출신도 다수 있었단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철저한 유교주의 시대로성에 대한 억압과 금기가 심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본능인 색을 경계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인권은 남존여비사상에서 멸시됐다. 조선시대 성의 억압은 철저하게 서민층 상인들과 여성들에게만 강요 또는 적용됐던 것이다. 성종은 '재가녀 자손 금동법'을 공포하면서 재가까지도 음행으로 단정하기에 이르렀고 재가한 여성의 자손은 일체의 과거와 벼슬에서 소외시켰다. 또한 유부녀나 과부로서 음행이 알려지면 극형으로 처리하는 법률이 적용되는 때라 자녀(恣女)의 살해는 자녀목, 자녀암, 자녀굴 등 비정의 기이한 민속으로 고정돼 전승되기에 이르렀다. 예전에는 오늘날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부정한 성 의식 풍습이 있었던 것이다.
< 송홍선 민속식물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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