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기는 산림청/꽃과 나무

진달랫빛 황진이의 남성 편력과 일화

대한민국 산림청 2009. 10. 16. 17:29

어느 날 절터를 산책하다가 큰키나무와 진달래를 소재로 자신의 인생역정을 비유한 듯한 시를 읊었다던 황진이. 진달래꽃처럼 아름다운 그녀가 한창 때에 이름을 날려 큰키나무처럼 우뚝 솟았어도 후에 망가지고 나면 폐허가 된 절터처럼 쓸쓸한 법을 상기시켰다.

 

문득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시 한 수가 생각난다. 어려서부터 황진이(黃眞伊)를 그리워하며 동경했던 임제는 평안도사로 임명되어 가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지나다가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 자리에서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가/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고 읊어 애도했다. 임제는 처신에 걸맞지 않게 기생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이유만으로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해임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임제가 표현한 홍안(불그스레한 얼굴)은 마치 진달래의 꽃빛깔을 연상케 한다. 북한에서 펴낸 소설『황진이』에서 성숙한 그녀를 '첫 봄에 망울 터진 진달래의 연분홍빛'으로 비유하지 않았던가.

 

일각에서 한국을 빛낸 100대 위인의 한 사람으로 꼽은 조선 중종 때의 명기 황진이. 그녀는 송도(松都, 지금의 개성) 출생의 기생이다. 기명은 명월(明月). 양반 황이(黃伊)와 소실 김씨의 딸로 태어났으며, 15세에 모친이 사망한 후 스스로 기적에 이름을 올렸다. 기생이 된 후 뛰어난 미모와 활달한 성격, 청아한 소리, 예술적 재능으로 인해 이름을 날렸다. 특히 학자, 문인 등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며 숱한 일화를 남겼다.

협객의 풍으로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뭇 남성들을 굴복시켰던 황진이. 왕실의 종친이라는 유학자 벽계수(碧溪守=水)도 무너뜨린 그녀가 십수 년이나 반쯤 감은 눈으로 벽만 바라보며 수도에 정진하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찾아가 미색으로 유혹해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어느 여름날에 지족선사가 홀로 수행하고 있다는 굴을 찾아갔다. 마침 비가 내려 흠뻑 비에 젖었다. 비에 젖은 옷을 벗고 알몸을 드러내자 지족선사가 황진이의 품에 무너져 내렸단다. 이때 생긴 말이 '10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란다.

 

큰키나무와 진달래를 자신에 비유


황진이는「청산리 벽계수야…」라는 시조로 잘 알려진 시인이다.「등만월대회고(登滿月臺懷古)」,「박연폭포(朴淵瀑布)」,「송별소양곡(送別蘇陽谷)」 등의 한시와「동짓달 기나긴 밤을…」,「청산은 내 뜻이요…」 등이 전하지만 꽃나무 소재의 시는 적은 편이다. 황진이는 산기슭에서 우연히 만난 부운거사(浮雲居士)와 처음으로 헤어진 어느 봄날에 고독을 달래려고 만월대(滿月臺)로 산책을 나갔다가 서글픈 생각에서 한시 한 수를 읊었다. 그것이「등만월대회고」인데 이 한시에 큰키나무와 진달래가 등장한다.

 

옛 절은 쓸쓸히 어구 옆에 있고
저녁 해가 큰키나무 비치어 서럽다
차가운 안개는 속에 스님의 꿈만 남았는데
세월만 첩첩이 깨진 탑머리에 어렸다.
봉황은 어디가고 참새만 날아오니
진달래 핀 터에 염소만 풀을 뜯네
호사롭던 그 옛날을 생각하니
어찌 봄이 온들 가을 같을 줄 알았으랴.

 

황진이는 폐허가 된 절 주위를 배회하며 애닮은 감회를 품고 시를 읊었던 것이다. 호사로운 시절이 가면 허무한 것으로 생각했을까. 번창했던 절터는 우뚝 솟은 큰키나무가 서 있고 아름다운 진달래(두견화)가 피었건만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음을 깨달았다. 즉 진달래 꽃처럼 아름다운 그녀가 한창 때에 이름을 날려 큰키나무처럼 우뚝 솟았어도 후에 망가지고 나면 폐허가 된 절터처럼 쓸쓸한 법. 큰키나무와 진달래는 그녀 자신이었을 게고 자신에게 다가올 인생역정을 비유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동, 매화, 잣나무 소재의 시를 읊기도


그녀와 교류한 사람으로 10년(또는 30년)이나 면벽수련으로 유명한 고승 지족선사, 대학자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판서 소세양(蘇世讓), 종실 벽계수 이창곤(李昌坤), 선전관 이사종(李士宗), 재상의 아들 이생(李生) 등이 있으며 남사당패와도 가까이 지냈다.

 

황진이는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리는데 이의 유래 또한 그녀가 만들어냈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에 학문이 높은 서경덕을 찾아갔다가 그의 높은 인격에 탄복해 그를 사모하면서 스승으로 섬겼다. 어느 날 황진이가 문득 서경덕에게 "송도에는 꺾을 수 없는 것이 3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박연폭포요, 둘째가 선생님이고, 셋째는 바로 저입니다."라고 말했단다. 송도(개성)에서 도저히 꺾을 수 없거나 가장 뛰어난 3가지의 송도삼절은 그렇게 황진이의 입을 통해 만들어졌다. 당대의 판서이며 풍류객이던 소세양과의 만남에서는 꽃나무를 소재로 한 한시를 읊었다. 소세양은 언제나

"여색에 미혹되면 남자가 아니다."라고 했으며, 황진이의 재주와 얼굴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는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녀와 30일만 같이 살면 미련없이 헤어질 수 있으며 하루라도 더 묵는다면 사람이 아니네."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러나 막상 송도로 가서 황진이를 만나 30일을 살고 어쩔 수 없이 떠나려 하는 날에 그녀가 다락(누)에 올라 읊는 작별의 한시를 듣게 됐다.

 

달빛 어린 뜰에 오동잎 모두 떨어지고
서리 중에도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네
다락은 높아 하늘에 닿고
오가는 술잔은 취해도 끝이 없네.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내일 아침 님 보내고 나면
사무치는 정 강물처럼 끝이 없으리.

 

바로「송별소양곡(送別蘇陽谷)」이다. 이 시를 들은 소세양은 결국 호언장담을 꺾고 탄식을 하면서 "나도 사람인지라 네 정성을 어찌 짓밟고 떠날 수가 있겠나."라며 더 머물렀단다. 이 시에서 황진이는 이별을 눈앞에 둔 처량한 자신의 심정을 오동나무(벽오동나무)의 잎이 떨어지는 가을에 비유했으나 정작 이별의 시기는 매화나무의 꽃향기가 물씬 풍기는 이른봄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황진이는 세월이 흐른 뒤에 자신의 첫사랑을 생각하며「잣나무조각배(小栢舟)」라는 시 한 수를 읊기도 했다.

 

강 가운데 떠 있는 조그만 잣나무 조각배
몇 해나 이 물가에 한가로이 매였던가
뒷사람이 누가 먼저 건넜느냐 묻는다면
재능을 모두 갖춘 만호후라 하리.

 

야담은 생활문화 효시로도 전승


황진이와 벽계수의 만남에서도 재미있는 야담이 전한다. 벽계수는 명사가 아니면 좀처럼 만나주지 않던 황진이에 대해 친구 이달과 의논했다. 그때 이달은 "황진이의 집을 지나 다락에서 술을 마시고 한 곡을 타면 그녀가 다가올 것인즉, 그때 본 체 만 체하고 일어나 말을 타고 가면 황진이가 따라올 것이다. 그러나 다리를 지날 때까지 돌아보지 마라."고 일렀다. 벽계수는 친구의 말대로 실행한 후에 다리로 향했다. 이때 황진이가 '청산리 벽계수(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라는 시를 읊었다. 이 시를 들은 벽계수는 다리목에 이르러 그만 뒤를 돌아보다가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황진이는 넌지시 웃으며 "벽계수는 명사가 아니라 풍류랑(風流郞)이다."라면서 돌아가 버렸단다.

 

명창 이사종과는 그의 집에서 3년, 자기 집에서 3년 모두 6년간이나 계약동거하다 헤어졌다. 또한 그녀는 풍류묵객들과 명산대첩을 두루 찾아다니기도 했는데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 때는 절에서 걸식하거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했다. 황진이는 30년 남짓 살다가 몸이 아파 죽을 때에 "곡을 하지 말고 풍악으로 대신하며, 나무관 속에 넣지도 말고 땅속에 묻지도 말며 동문 밖의 모래땅에 시체를 버려 하찮은 벌레의 밥이 되게 해 천한 여자들에게 경계를 삼게 하라는 등의 유언을 했다."는 야담도 전한다.

 

아무튼 황진이는 송도삼절이라고 자칭할 정도로 자부심이 강한 여인이었고, 수양을 쌓는 생불의 지족선사를 파계시킬 만큼 남성 편력(遍歷)의 재능이 있었으며, 선전관이며 명창으로 유명한 이사종과의 6년에 걸친 계약동거는 오늘날의 계약결혼 효시라면 어떨까. 또한 그녀의 유언은 땅속에 묻는 매장문화가 바꿔지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이제 진달래가 만발하는 때가 다가왔다. 불그레한 진달래꽃을 보며 황진이의 애틋한 사랑과 재능을 다시금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 송홍선 민속식물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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