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기는 산림청/꽃과 나무

명기(名妓) 매창(梅窓)의 사랑과 이별의 꽃나무

대한민국 산림청 2009. 10. 16. 17:38

 조선 중기의 부안 기녀 매창. 달빛에 젖은 매화를 자신의 처지로 여겨 좋아했다. 소나무의 절개처럼 사랑을 굳게 맹세했건만 기약없는 시름을 시로 달래야 했다. 그녀가 시재로 즐겨 삼았던 꽃나무는 매화나무, 배나무, 버드나무, 대나무,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등이다.

예전에 술자리에서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거나 흥을 돕는 일을 업으로 삼던 여인. 그런 여인이 바로 기녀(妓女)이다. 알기 쉽게 기생(妓生)이라 부르는 것이 좋겠다. 반드시 얼굴이 예쁘지 않아도 된다. 빼어난 몸매를 지녀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춤과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솜씨가 있으면 그만이다. 거기에다 시를 읊을 줄 알면 더욱 좋다. 당시에 제도적으로 불합리한 인습과 불우한 가정의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기생. 이루지 못한 사랑과 한이 응어리진 삶의 방식이 오늘날에도 애절하게 전한다.

달빛 젖은 매화를 좋아한 기녀 매창


둥그스름한 얼굴로서 빼어난 미모를 갖추지는 않았지만 시와 거문고에 능했던 여류시인이 있었다. 조선 중기의 부안 기생 매창(梅窓)이다. 1573년 부안읍의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첩에게서 불우하게 태어난 매창은 기생의 몸으로 온갖 원한을 시로 달래고 거문고로 되새겨 가다가 38세를 일기로 서럽게 죽은 한 많은 여인이다. 본명은 이향금(李香今), 자는 천향(天香).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 불렀으나 기생이 된 후에는 이름을 계랑(癸娘, 桂娘)으로 바꿨다.

 

매창은 자신이 직접 지은 아호이다. 부용, 황진이와 함께 3대 시기(詩妓)의 한 사람이다.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읊은 시재(詩才)가 많은데, 그 중 꽃나무의 시재를 엿본다. 매창의 개인적 정서표현을 꽃나무에서 찾아봄이다. 어느 날인가 지나가던 나그네가 시를 지어 보이며 집적대자 매창은 즉시 운을 받아서 응수할 정도로 여류시인으로서의 재질을 타고났다.

 

떠돌며 밥얻어 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찬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을 홀로 사랑했지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맘대로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어라.

 

 

매창은 세상을 한탄하며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시로 읊었다. 호가 매창(梅窓)이라서인지 그녀는 매화를 무척 좋아했다. 그것도 달빛 젖은 매화를 사랑한다고 읊었다.

 

평생에 기생된 몸 부끄러워라
달빛 젖은 매화를 사랑하는 나
세상사람 내 마음 알아주지 않고
오가는 길손마다 집적거리네.

 

그렇다. 매창은 달빛에 젖은 매화를 좋아했다. 그런데 왜 그녀는 달빛에 젖은 매화를 좋아했을까. 그것은 자신의 처지를 말함이었을게다. 그렇게 드러내놓고 싶지 않은 기생의 몸을 어둠 속의 매화로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매창이라는 아호도 직접 지은 것이 아닌가. 매창은 흰눈이 쌓여 매화가 피어나지 않은 까닭도 자신과 연관시켰다. 매화가 피어나지만 그 꽃을 누가 알아줄 것인가에 의문을 가졌다.

 

봉래산 북쪽에 흰눈이 쌓여
매화꽃 피기가 마냥 더디니
봄이 오면 일찍 피어나련만
그 꽃을 어느 누가 보아주랴.

 

매창은 아름답고 고상한 매화가 곧 자신일지라도 기생의 몸을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곧 매화는 자신이었고 또한 자신의 처지로 보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사랑은 깊고도 깊었다. 그녀는 당대의 문사인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에 이어 이웃 고을 김제군수로 내려온 이귀(李貴)를 비롯해 허균(許筠) 등과 교유가 깊었다. 이귀나 허균과는 정신적인 사랑이었다면 유희경(1545~1636)은 그녀가 마음으로 사랑한 단 한 사람이었다.

 

남쪽나라 바다 위에 앉았던 그 님
대숲 그늘 암자에서 만나던 그 님
그리운 그 님은 지금 어디 있는가
검은 머리 붉은 얼굴 꿈속에 보이네.

송백같이 굳은 맹세하던 날은
사랑이 깊어 깊어 바다였건만
한 번 가신 그 님은 소식이 없어
한밤중 나 홀로 애를 태우오.

 

소나무 절개처럼 유희경과의 사랑 맹세


매창은 대나무숲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소나무의 절개를 믿고 사랑을 굳게 맹세했다. 그녀의 사랑은 대나무처럼 곧고 높았다고 하면 어떨까. 비록 기생의 몸이었건만 군자처럼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선하게 보이기 위해 대나무가 있는 암자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굳게 맹세했다. 대부분의 기녀생활이 그러했겠지만 매창의 삶도 기구했다. 현리(縣吏) 이탕종의 서녀(庶女)였던 매창은 아버지를 잃고 나자 고아가 됐고 이어서 기생의 길로 들어섰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46세의 유희경을 만난 후 임진왜란으로 기약도 없이 헤어지고 여러 남자를 만나면서 이별을 알고 시름을 느끼게 됐다.

 

하룻밤 봄바람에 비가 오더니
버들이랑 매화랑 봄을 다투네
이 좋은 시절에 차마 못할 것은
잔 잡고 정든 님과 이별이라오.

 

특히 유희경과 첫 만남이 있은 지 15년이 지난 후 두번째의 짧은 만남과 이별은 매창에게 더욱 깊은 그리움을 남겼다. 매창은 유희경과 함께 다니던 장소를 홀로 헤매거나 늦은 밤 거문고를 타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랬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매창에게 있어서 배꽃은 이별과 시름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소재였다. 매창은 배꽃이 보슬비처럼 떨어지는 날에 떠나가 버린 사랑하는 사람을 가을에 만날 수 있기를 그리워했다. 자연현상과는 대조적으로 소생의 계절인 봄의 이별과 죽음의 계절인 가을의 만남을 정서적으로 극대화했다. 떠나간 사람이 자신을 그토록 생각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녀는 기다리고 기다리기를 반복하며 시름에 젖으면 시를 읊고 거문고를 탔다.

 

대숲에 봄이 깊어 새벽조차 더딘데
인적 없는 뜰에는 꽃잎만 휘날리네
거문고로 이별곡 타다 멈추고
가슴 벅찬 시름을 시로 달래오.

복숭아 밭에서 맹세할 땐 신선 같던 이 몸이
이다지도 처량할 줄 그 누가 알았으랴
애달픈 이 심정을 거문고에 실어볼까
가닥가닥 얽힌 사연 시로나 달래볼까.

기약없는 이별과 시름을 시로 달래보지만


매창은 사무치는 시름을 시로 달래보지만 마음은 조금도 시원치 않았다. 배꽃이 떨어지는 날 떠나간 사람은 계절이 몇 번 바뀌어 배꽃이 피는 봄이 돌아왔건만 다시 오지 않았다. 이처럼 매창은 사랑이 깊었지만 이별과 시름도 깊었다.

 

배 꽃피는 뒷동산에 두견이 울고
뜰에는 달빛 넘쳐 서러운데/
꿈이나마 꾸자건만 잠도 안 와서
창가에 기대앉아 닭소리만 들으오.

먼 산은 하늘가에 푸르게 솟고
버들 강가에는 안개가 자욱
나의 님은 지금쯤 어디 계실까
살구꽃 핀 마을에 고깃배만 떠오네.

 

매창의 죽음은 유희경과의 두번째 이별 뒤 3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매창은 유희경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 그것이 유희경에 대한 마지막 사랑이었을까. 매창은 부안읍 봉덕리 산야에 그녀와 동고동락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그가 죽은 후 45년 후인 1655년에 무덤 앞에 비석이 세워졌고, 그로부터 다시 13년 후에 고을 사람들에 의해 전해지던 시 58편을 고향 아전들이 모아 목판으로『매창집』을 엮었다. 그후 세월이 지나 그의 비석의 글들이 이지러졌으므로 1917년에 부안 시인의 모임단체에서 다시 비석을 세우고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새겼다.

 

그의 묘는 1983년 8월 지방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됐다. 1974년 4월 27일에는 매창기념사업회에서 서림공원 입구에 매창의 시비(詩碑)를 세웠다. 매창이 간 지 400여 년. 지금 거문고 소리는 들을 수 없다. 시만 50여 수 남아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애석할 뿐이다. 당시에 그녀가 시재로 삼았던 매화나무, 배나무, 버드나무, 대나무, 살구나무, 복숭아나무는 지금 부안에 남아 있을 터이지만 찾을 길 없어 안타깝다.


< 송홍선 민속식물연구소장 > 

 

산림청의 소리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감이 되셨다면 VIEW를! 가 져가고 싶은 정보라면스크랩을! 나도 한 마디를 원하시면 댓글을!
여러분의 의견을 모아서 정책에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