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est 소셜 기자단 -/2013년(4기)

강화도 전등사의 오랜 역사와 자연의 조화로움

대한민국 산림청 2013. 10. 29. 13:25

 

강화도 전등사

오랜 역사와 자연의 조화로움

 

 

산림청 블로그 주부 기자단 오성희

 


 계절은 참 공평합니다. 절기의 순환은 어김없이 무더위를 밀어내고 그 자리에 어느덧 가을을 초청했습니다. 산사의 가을빛이 한층 아름다운 것은 사찰을 둘러싼 숲과 나무가 어우러진 고즈넉함 때문일 것입니다.

 

 


강화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강화도 정족산성 안에 있는 우리나라 불교역사가 시작될 고구려소수림왕11년(서기381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은 당시 강화도를 거쳐 신라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아도 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송사였다고 합니다.
 

 

 

전등사 입구에는 돌로 쌓은 아치형의 동문이 있는데 그곳에 있는 삼랑성(국가사적 제130호)은 단군의 세 아들이 축조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동문 안으로 들어서면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양헌수(1816~1888)장군의 승리비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등사는 조선말기에 접어들면서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국난을 지키는 요충지 구실을 하기도 했습니다.

 

 

 

 

전등사는 다른 사찰과는 달리 일주문이나 불이문이 없습니다. 그 대신 호국의 상징인 삼랑성 동문과 남문이 전등사의 일주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600년의 역사를 지닌 전등사는 대웅보전(보물178호) 약사전(보물179호), 범종 등 보물급 유적을 비롯해 국가사적, 인천시지정 유형문화재 등 우수한 문화유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곳 종각에 보관되어 있는 동종은 보물 제 393호로 중국북송시대의 종이라고 합니다. 이 종이 어떤 경위로 전등사에 전해지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일제 강점기말 군사물자 수집 때 강제로 빼앗겼다가 8.15해방 후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전등사로 옮겨졌다고 전해집니다.

 

 

 

조선중기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전등사의 대웅보전이 널리 알려진 것은 대웅전 네 모서리 지붕의 밑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의 전설 때문입니다.

 

 


지금의 대웅보전 추녀 밑에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이 되어 진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광혜군 때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맡았다고 합니다. 그는 공사도중에 주막을 드나들며 주모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고 불사가 끝난 후 부부의 연을 맺기로 약속을 하고는 돈이 생길 때 마다 주모에게 모두 주었다고 합니다.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 하던 도편수가 공사 막바지를 이른 어느 날 주막을 찾아 가보니 주모는 자취를 감춰버린 뒤였다고 합니다. 배신감에 젖어 있던 도편수는 주모에 대한 분노 땜에 일손이 잡히지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고쳐먹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 하면서 대웅전 네 귀퉁이에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을 만들어 올려놓았습니다. 나녀상을 만들어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또 머리위에 무거운 지붕을 얹어 고통을 줌으로서 배반한 여인에게 복수를 했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또한 그 이면에는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뉘우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들어 있어, 이런 조각상을 보게 될 후대의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으라는 뜻도 담겨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답니다. 공허한 물질의 축적과 소비에 현혹되는 삶이 아닌 인간으로서 지녀야 될 바른 양심을 돌아보게 하는 깨우침을 가져보게 합니다.

 

 


강화도는 섬 자체가 역사박물관이라고도 합니다. 그 중 천년고찰 전등사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으로 강화도의 명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사찰로서 현존하는 사찰 중에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찬란한 역사만큼 그곳을 지키며 함께 한 오랜 된 나무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수령이 약 600백년과, 500백년이 훨씬 넘은 두 그루의 은행나무는 암나무로 많은 양의 열매를 맺는 나무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암나무이지만 열매를 전혀 맺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불교탄압이 심했던 조선조 말엽 조정에서는 전등사 탄압의 일환으로 은행나무 열매에 대한 가혹한 공출을 지시했는데, 그 양이 실제 이 은행나무가 맺는 열매의 양보다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조정의 시달림을 받은 스님들은 이 나무가 아예 열매를 맺지 말아서 더 이상 조정의 압박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게 정성을 다해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 후 이듬해부터 실하게 열렸던 열매가 하나도 열리지 않았고 지금은 암나무로 열매가 열지 않는 나무로 전등사의 명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의 힘은 자연의 섭리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실로 놀라움입니다.

 

 


전등사는 오롯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어느 곳에서 바라보든 초록으로 우거진 숲과 숲길을 바라보게 됩니다. 산등성에서 조금씩 내려앉은 가을빛은 나뭇잎에 스며들어 산사의 뜰 안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가끔 산사를 즐겨 찾는 것은 마음 둘 곳을 찾아 내면의 흐트러진 퍼즐들을 맞추어 보게 하는 발걸음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고즈넉한 산사가 주는 편안함이 있고 자연과의 소통이 있으며, 숲이 가진 치유의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위치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5번지(www.jeondeungsa.org)
 전화 032- 937-0125
 초지대교에서 최근 직선 길이 개통되어 5분 정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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