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est 소셜 기자단 -/2014년(5기)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곳, 한양 성곽 낙산길을 따라서

대한민국 산림청 2014. 4. 16. 10:36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곳,

한양 성곽 낙산길을 따라서

 

 

산림청 블로그 일반인 기자단 이재철

 

 

 

 역사의 물길 낙산을 바라보며

 

한양이 문을 열었을때
남산의 물을 모아 흐르던 곳
二間水門을 지키던 광희문.

세월의 등허리를 감아 돌아
이끼 낀 물길은 땅에 잠기고
낙타처럼 느릿 느릿 묵묵히 걷고 있다.

낙산 돌숲에서 부는 바람 따라
흥인지문 석양에서 비치는 노을따라
지나 간 민초들의 주름을
말끔히 헹구어 내고
구름과 별을 되짚어 돌아가는 길.

새로 태어난 걸음이 가볍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2,4,5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 출입구-광희문-동대문역사문화공원-흥인지문-동대문성곽공원-암문-낙산공원-혜화문-이화마을-대학로-흥사단 / 5.1㎞(2시간 소요)

 

 

 

조선 초기에 한양 성곽을 쌓을 때 사소문(四小門)중에 서쪽을 담당하는 문이 광희문이다. 이곳 바로 옆이 남산에서 내려와 청계천을 흘러서 성밖으로 나가는 물길인 이간수문(二間水門)이 있던 자리이다. 광희문은 작은 문으로써 궁궐이나 고관대작들이 사적으로 많이 이용하던 문이기도 하다.

 

 

 

흥인지문(興仁之門)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다 보면 초현대식 건물이 나오는데 바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다. 1960-1970년대 고교야구의 산실인 동대문 야구장과 차범근 선수로 대표되는 축구장이 있던 자리이다. 40-60대 장년층의 젊음과 꿈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곳은 UFO 닮은 초현대식 건축물과 아름다운 잔디 공원으로 탈바꿈 되어 있다. 인근에는 현대식 쇼핑몰이 자리 잡고 있고 바로 앞에는 서울 시티투어 버스 정류장이 있어 한류를 이끄는 경제,역사,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북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조선시대 한양 방위와 치안을 담당하였던 흥인지문(동대문)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유학의 5대덕목인 仁義智禮信을 따라서 흥인지문이 되었으며 풍수설에 의하면 仁은 木에 속하고 목은 동쪽에 속하므로 흥인은 동방을 뜻하는 것 이라고 한다.

 

 

 

동대문을 돌아서 위쪽으로 얕으막한 구릉이 바로 동대문성곽공원이다. 8차선 도로로 인하여 100미터 구간에 성곽이 없어지고 이곳부터 옛 도성 성곽을 복원해 놓았는데 그 출발점이 바로 성곽공원이다.

 

 

 

 6백년전에 쌓아 놓은 이끼 바랜 화강암과 새로 복원한 돌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곽을 끼고 돌아서는 오솔길이 바로 낙산의 시작이다. 낙산은 서울의 형국을 구성하던 내사산(남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의 하나로 풍수지리상 주산인 북악산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이다. 이렇게 소중한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는 낙산은 일제의 강점기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부분이 파괴 · 소실되었고 특히 60년대 이후의 근대화 과정에서 무분별한 도시계획으로 인해 아파트와 주택이 낙산을 잠식한 채 오랜 시간 방치되어 역사적 유물로서의 제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낙산의 모습이 낙타등처럼 굽어서 그런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이에 서울시에서는 공원녹지확충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낙산을 근린공원으로 지정하고 주변의 녹지축과의 연결을 도모하면서 낙산의 모습과 역사성을 복원하는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비밀통로인 암문을 낙산에 여러 곳 만들었다. 암문은 궁궐의 은밀한 내통을 위한 문으로써 군사적,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성곽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봄을 알리는 소나무와 새싹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된다.

 

 

 

 

 낙산 구릉을 오르다 보면 왼쪽 마을이 그 유명한 벽화마을이다. 대학로 예술사업의 일환으로 조성된 벽화마을은 그 자체가 미술관이기도 하다. 젊은 화가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개성있고 창의적으로 구성해 놓은 예술작품은 그야말로 낙산공원의 자랑거리이다.

 

 

 

벽화마을을 돌아서 아늑한 언덕에 고즈넉한 이화장(梨花壯)이 자리잡고 있다. 이화장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거주하던 곳으로, 현재는 그의 유품을 소장하고 있다. 본체인 기와집과 부속 건물인 조각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조각정은 1948년 당시 초대 내각을 구성하던 곳으로 ‘이승만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원래 이 일대는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의 학자 신광한의 옛 집터로, 신대(申臺)라고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던 명승지였다. 인조(재위 1623∼1649)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화장 뒷문 개울가 바위에는 신대를 기념하기 위해 서화가 강세황이 쓴 ‘홍천취벽(紅泉翠壁)’이라는 글씨가 있었으나, 지금은 땅에 묻혀 있다.

 

 

이화장 지나면 바로 대한민국 젊음의 1번지 대학로가 나온다. 1970년초에 서울대가 관악산 자락으로 옮긴 이후에 조성된 대학로는 젊음의 추억과 낭만과 예술이 숨쉬는 문화 거리이다. 특히 소극장을 중심으로 연극과 뮤지컬이 공존하는 문화예술의 중심지이다. 피곤한 발길을 쉬면서 멋진 공연작품을 감상하면 휠링 재충전이 될 것이다. 필자도 알과핵극장에서 공연되는 ‘운현궁에 노을지다’ 라는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역사극을 관람하였다.

 

 

 

대학로 샘터 건물 바로 옆에는 흥사단(興士團) 본부가 있다.
흥사단은 도산 안창호(安昌浩)의 주도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1913년 창립된 사회교육·국민훈련 기관이다.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수양단체이다. 일제강점기 국내외에 지부를 설립하여 실력양성운동에 힘썼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광복이 되었지만 남북으로 갈라지고, 젊은이들은 일자리도 부족하여 꿈과 희망을 잃은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우리의 청년들에게 다시 한번 미래의 멋진 비젼을 주기 위하여 안창호 선생님의 말씀을 들려 주고 싶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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