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est 소셜 기자단 -/2014년(5기)

열 살 소년과 스물 일곱 살 아버지의 슬픈 이야기<화성 융건릉>

대한민국 산림청 2014. 5. 28. 13:22

열 살 소년과 스물 일곱 살

아버지의 슬픈 이야기

- 화성 융건릉 -

 

산림청 블로그 일반인 기자단 김화일

 

 

 

『아,오늘날 나랏일은 머리털까지 다 병들었다.온갖 법도가 다 해이해졌는데도 개선될 가망이 없고, 조정의 기강은 확 풀려있고 민생은 곤경에 지쳐있다.

 (중략)

 기풍을 세우고 세상에 기운을 불어넣어 기우는 나라를 붙잡고 위기를 헤쳐나갈 책임을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정조 치세 어록"中에서, 2011년 刊, 안대회 箸-

 

세상이 온통 남해안 바다 이야기로 출렁인다.고귀한 생명과 신뢰는 하염없이 그 바다 물 밑으로 가라앉아 버렸는데,그동안 오랜 세월동안 교묘하게 은폐되고 묻혀 있었던 세상 속의 암초들은 오히려...
그 옛날 복마전의 그것처럼 일제히 물 밖으로 나와서 악취를 풍기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짐작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아예 모르고 있었던 진실들,언젠가는 도려내고 잘라내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일찌기 알면서도 단지 내 일이 아니라는 까닭으로 유기하고 방치해 두었던 일들.아무래도 지금의 이 악취는 오래 갈 것만 같다.

 

우리들의 착하디 착한 아이들을, 고인들을 생각하면서... 그들이 심해(深海)에서 통곡으로 밀어 올린 세상의 치부들을 곱씹으면서... 그동안 생각만 하고 있었던 그 곳으로 간다.

 화성 융건릉(隆健陵)

 

 

 세계 왕조사에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연과 곡절을 가진 궁중 애사(哀史).
세상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아들을 절명케 했던 왕의 이야기,준엄한 아버지의 빈틈없는 훈육과 왕실 법도에 질식해야 했던 왕자의 이야기, 그 왕자의 비극적인 현장을 몸으로 지켜봤던 여인의 이야기, 그리고 왕자인 아버지의 말년을 지켜봐야 했던 열 살 아이의 이야기.그 아이가 머지않은 훗날 왕이 되어 바라보는 사부곡(思父曲)의 현장을 간다. 세상이 모두 가라앉아버려 천근의 무게로 침잠하다 못해 남겨진 이들은 그들의 가슴을 분노의 울분으로 기화하고 있을 무렵, 하지만 봄은 그들만의 향기와 채색으로 세상을 온통 덮고 있다.
그렇게 참으로 잔인했던 4월이 5월이 넘도록 계속되는데.

 

 

 2009년,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융건릉은 사적 206호이기도 하다. 조선 왕릉은 모두 42기(基).
조선조에는 실록상으로 모두 8명의 황제가 존재한다. 조선 최초로 황제 시호를 가진 고종과 순종,
그리고 황제의 직계 6대조(왕은 4대조까지)까지 추존하여,철종, 헌종, 순조, 정조, 장조(사도세자), 태조까지를 황제로 칭한다.

 

 
 융릉(隆陵)은 비운의 왕자 사도세자와 그의 정비 혜경궁 홍씨와의 합장 능(陵)이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 임금은 재임기간 그의 아버지를 임금으로 추존하려고 생전에 무던히도 애를 썼으나 노론과 벽파(僻派)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혀 왕으로의 추대는 고사하고 능이라는 이름조차도 붙이지 못했다.

왕으로로서의 추존과 황제로서의 추존은 고종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임금이 원래 양주 배봉산(지금의 동대문구 전능/휘경동 소재)에 초라하게 방치되었던 사도세자의 무덤(영우원/永祐園이라고 칭함)을 이곳으로 이장(移葬)하고
산 이름도 화사한 화산(花山)으로 바꿔달고.그 이후, 정조 임금 역시 같은 산 이웃 기슭에 자신의 음택까지 마련한다. 부자지간의 거리는 쌍화차 한 잔을 타서 몸소 들고 가도 식지 않을 거리인 2,180m. 풍수가들은 이 곳을 대단한 명당터로 본다는데, 풍수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봐도 포근한 새둥지를 연상시키는 아늑함이 느껴진다.

 

 

 들머리는 온통 소나무 숲이다.
솔숲을 조림하고 하도 송충이가 창궐을 하기에 정조 임금이 친히 송충이를 잡고 심지어 그것을 입에 넣어 씹어버림으로써 그 이후로 송충이가 식겁을 하고 자취를 감췄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곰송과 적송이 골고루 섞여서 키높이를 자랑한다.

 

 

 건릉(健陵)은 정조 임금의 능이고, 융릉(隆陵)은 사도세자의 능이다.
여기서 나그네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우리는 장유유서를 배운 예인(禮人)이 아니던가,당연히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부터. 본격적인 들머리는 우회전하여 융릉을 배알하고 숲속 길을 걸어서 건릉을 두번 째로 배알하고 좌측 들머리로 나오는 것으로.

 

 

 올 해 처음 갈아입은 신상 초록이 애기 손처럼 곱다. 온통 참나무 군락들이다. 대부분은 갈참나무들.

정조 임금이 이 곳의 숲을 비옥하게 하기위해 인근 주민들에게 가구당 한 삼태기씩의 재<灰>를 가져다 뿌리게 하여 이 숲을 꾸렸다고.

 

 

수원과 화성은 정조의 도시이다. 그리고 정조가 심혈을 기울인 개혁의 도시이다.

『사람과 사람이 화목하고 집집마다 부유해지는 곳 (人人和樂 戶戶富實) 』 정조의 그 바램이 여기서 실현되고 있는 중이다.

 
『책상에 반듯하게 앉아서만 책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주어진 환경에 따라 틈틈히 읽어도 좋은 게 바로 책이다.』 -정조의 어록인 <일득록,日得錄중에서>-

 

정조는 독서를 권장했다. 특히 동시대를 살다간 이덕무, 박지원, 정약용과 더불어 정조 또한 당대의 독서광이기도 했으니...그 때 뿌려진 정조 임금의 독서열이 여기까지 이어져 만연하다.
사랑하는 이와 황제의 숲에서 황후의 독서를 하는 이들~!

 

 솔향이 사방에 지천이다. 더러 겨드랑이를 스치는 새앙 바람이 정겹다.

 

 

사도세자(장조,莊祖)와 혜경궁 홍씨(현경황후,獻敬皇后)의 합장능, 융릉(隆陵)이다.

조선왕조의 42기 능중에서 가장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는 능, 그것은 아들 정조의 효심이었기에 가능했을 터이다. 다른 능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다른 능은 홍살문에서 바라보면 정자각(丁字閣)이 시야를 가려 능을 볼 수 없는데,여기서는 봉분을 뚜렷하게 볼 수 있도록 우측으로 치우쳐 있다는 점이다.

뒤주 속에서 밀폐와 암흑 그리고 절망 속에 죽어간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죽어서라도 시야를 틔워주고자 했던 아들, 정조의 배려가 깔린 능의 배치인 셈.

 

 사도세자의 융릉, 지금은 엄연히 황제의 능이다. 사도세자의 아버지로 조선 최장수 왕인 영조 임금도 황제의 호칭을 받지 못했는데.왕위에도 오르지 못한 그는 황제로 추승되어 있다.

영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배다른 형의 요절로 세자의 자리에 올랐던, 그 누구도 차기 왕위 계승자임을 부인하지 않았던 왕자, 그런 그가 왜 그렇게 비참하게 최후를 마쳐야 했는지는 아직도 그 원인이 마냥 분분하기만 하다.그래서 수많은 영화로 소설로 책으로 현대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는 중.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라는 추악한 탐욕이 만들어낸 당리당략의 희생자라는 점은 어느 누구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현릉원(顯陵園), 사도세자(장조/莊祖,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1735~1762)
혜경국 홍씨(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1735~1815)의 능. 역사에서는 그의 비참한 최후를 애매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현재의 능은 충분히 수려하고 호화스럽다.

모란과 연꽃으로 화려한 병풍석(倂風石)을 둘렀으며 정조 임금도 깔지 못한 와첨석(瓦詹石)까지 임금처럼 깔았다. 한가지 타 왕릉과 비교한다면 난간석이 없다는 것이 옥의 티일 뿐. 아마도 여기까지가 아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할 수 있었던 효도의 끝이 아닌가한다.

장헌세자(莊獻世子)까지는 추존했으나 끝내 왕의 자리까지 복원시키지는 못했으니.

 

 한자어 정자(丁字)처럼 생겼다하여 정자각(丁字閣), 왕과 왕비의 신좌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사도세자, 그는 부왕 영조의 지시로 "뒤주"속에 갇혀서 죽었다고 알려져 있다.
실록에는 뒤주라는 어휘가 없지만 좁고 폐쇄적인 공간은 확실한 모양이다.실록에는 "어떤 물건<一物>"에 "엄히 가두었다"라고 되어있으니.한여름(윤5월)에 뙤약볕을 고스란히 맞으면서 무려 8일간이나 물 한 모금 죽 한 숟가락 없이 웅크리고(?)있도록 했다면...이른바 아비가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아들을 고문사 시키는 임오화변의 모습이다.

 

가능한 일일까, 아무리 엄중한 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차라리 사약을 내리던지 참수형을 내려 죽음의 공포라도 덜어주지.사도세자가 죽은 후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 사도세자의 모습은 뒤주벽을 얼마나 긁었는지 손톱이 다 빠졌다했고,자신의 오줌까지 받아 마셨던 흔적이 있다고 했으며.심지어 굽힌 몸이 경직되어 입관조차 힘들었다고 했으니...

인간의 잔인함이란 어디까지 일까... 안타까운 일이다.
여기까지 와서도 여전히 떨쳐 버릴 수가 없다.폐쇄된 공간에서 차츰차츰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확인해가는 그 고통은 과연 어떤 것일까.

 

영조가 직접 신하에게 구술하여 썼다는 그의 아들 사도세자를 위한  "어제 사도세자 묘지문(御製 思悼世子 墓誌文)"을 어떻게 봐야 할까,

 

『너는 어찌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중략...내 진실로 아무 일 없기를 바랐는데 9일 째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으니...』

무려 9일 간이나  삼복 더위에 방치하고도 인간의 생명이 온전할 거라고 봤다는 그의 말은 진심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아들 정조 임금을 배알하러 간다. 조선 왕조 519년 동안 부자지간의 묘소가 이렇게 한자락의 산세에 고즈넉히 마실가는 거리에 같이 있는 경우가 있었던가 알 수 없다.

 

정조 임금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담배 골초였다고 하는데. 두 분의 부자지간의 거리는 그야말로 담배 두어 대 피워 물면 갈 수 있는 거리다.
힘든 길도 투박길 길도 없다. 할아버지 손자가 뒤뚱거리며 아장아장 걸어도 충분히 착한 길이다.
굽 딱딱한 신사화를 신어도 킬힐의 키높이 하이힐을 신어도 좋다.

 

 

 나무는 대부분 낙엽 교목으로 참나무들, 그 중에서도 갈참나무가 많다. 높이가 예사롭지 않은데 30~40m를 넘나든다.

 

 

 

 봄 숲을 알리는 봄나무꽃의 전령사 귀룽나무도 꽃을 뒤집어썼다. 예로부터 귀신을 쫓는 나무인데 어떻게 황제의 음택에...하긴 황제의 영령은 귀신보다 상위에 계시니, 아울러 사도세자는 불과 최근까지도 "뒤주대왕"으로 신격화되어 많은 무속인들의 지주가 되어있었고...

귀룽나무 꽃의 꽃말이 "사색"이었던가. 정말 사색하기에 더 없이 좋은 길이다.

 

드디어 건릉 도착. 융릉과 너무 많이 닮아 있어서 안내판이 없었다면 길을 잘 못 들어 융릉으로 다시 돌아온 건 아닌가 착각할 정도.

건릉(健陵),정조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 1752~1800/재위,1776~1800)
효의황후 김씨(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1753~1821)의 합장릉(合葬陵).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과 닮은 꼴이다.

하지만 여기 건릉에서는 융릉과 달리 홍살문에서 정면을 바라볼 때, 정자각에 가려서 봉분이 보이지 않는다는게 차이라면 차이점.

 

정자각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그것과 판박이 처럼 같다. 아버지의 능을 조성할 때는 정조가 직접 발품을 팔고 설계에 참여하면서 정성과 배려를 더했다면 정조의 능은 신하들에 의해서 융릉의 설계대로 했을 터.

 

 

오히려 정조임금의 능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에 비해 호사스러움에서는 많이 뒤떨어진다고 보는데...
심지어 융릉에는 있는, 지표면을 연결하는 와첨석(瓦詹石)도 건릉에는 없다.

이는 정조 사후에 보위에 오르는 어린 순조임금을 대신해서 전권을 쥐고 수렴청정을 하게되는, 살아생전 정조의 정적이기도 했던, 정순왕후(貞純王后,1745~1805)의 농간이라고 봐야 할 터.

 

지금까지도 정조 임금의 독살설의 배후로 지목되는 그녀는 결국 노론과 벽파의 최종 배후일 수 밖에 없으니...조선 왕실에서는 임금의 유언 조작 등을 방지하고자 어떤 경우에도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여성이 임금의 임종 참여를 허락하지 않는게 법도였는데, 정순왕후는 조선 왕조 519년을 통틀어 내관과 의원까지 먼 발치로 물리치고 임금의 마지막 임종을 홀로 지킨 유일한 여성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게 또한 정조 독살설의 강력한 근거가 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도 임금의 몸은 부검조차 못하게 되어있었으니...정조 임금은 사대부 중심의 왕조 국가에서도 드문 개혁 군주 였다.

우리나라처럼 왕조 실록이 치밀하게 기록되어 있으면서도 사도세자의 세밀한 행적이나 정조의 내면에 대해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가 많다.

 

아버지 사도세자에 얽힌 수수께끼는 살아 있는 권력인 아들 정조에 의해 상당 부분 각색되고 삭제되어서 그렇다치고, 정조 임금에 대한 내용은 결국 승리자에 의해 씌어진 실록이라는 점에서 객관성을 인정해 주기에는 무리가 많을 것이다. 심지어 아내였던 혜경궁 홍씨가 저술한 그 유명한 "한중록"도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엮어 넣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자신의 친정 가문을 변론하기 위해 씌여졌을 지도 모르는 일.

여전히 의문은 많다.

 

 

조선 왕조는 엄연히 왕이 아닌 사대부가 다스리는 국가였다.극히 몇몇의 왕조를 제외하면 항상 왕은 기득권인 사대부의 틈바구니를 헤짚고 다니면서 절묘한 줄타기를 해야 했으니. 기득권을 가진 사대부들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개혁의 창날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없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서라도 그들의 밥그릇을 지켜야 했기에 사람을 죽이는 일조차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게 비록 용의 비늘을 가진 왕이라 할지라도.

 

출처 : 영화 ‘역린’ 포스터

한비자가  말한 역린(逆鱗)은 왕의 노여움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매우 편협적이고 국소적인 분야에서만 그렇더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그 시절에 가장 두려워 해야 할 두려움은 사대부의 노여움이었을 것이고,지금은 아직도 많이 미약하지만 국민의 노여움이어야 하지 않을까.어쨌건 세상에서 원칙과 상식을 벗어나 거꾸로 위치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피해야 할 일이다.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으로 찾아간 융건릉, 애초에 이미 굳어버린 속내를 온전히 풀어보고자 찾은 길은 아니었지만 예상대로 생각은 더 많아졌고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2백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이나 그 옛날 시절이나 사람사는 주변의 배경이 다소 바뀌고 사람들의 행색이 바뀌었을 뿐, 살아가는 방법은 무섭고 소름끼치도록 똑같다.

 

출처: 영화 ‘역린’ 중에서

 

햇볕이 무섭게 내려 쬐는 날, 어리디 어린 열 살짜리 소년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할아버지의 용포 자락을 잡고 매달린다. 이제 스물 일곱 살된, 우리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그 무렵 아이의 아버지는 뒤주에서 질식을 하며 죽어간다.
손톱이 빠지도록 뒤주를 긁으며, 자신의 오줌을 찢어진 부채살로 받아 먹어가며,그렇게 등이 굽은 채로 숨을 거둔다. 아버지 없이 남겨진 소년은 할아버지에 의해서, 좁은 뒤주 속에서 심하게 변형된 아버지로부터 강제로 격리된다. 열 살의 소년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도 볼 수 없었고 그 이후로 아버지라는 단어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기적처럼 소년은 자라서 왕이 되고 아버지가 죽어가야 했던 악취나는 세상을 바꾸려고 한다.

 

하지만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무뎌진 칼날로 묵은 고기의 비늘을 벗기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그렇게 힘을 쏟아 붓다가 결국은 힘에 지쳐 자신인지 타인인지도 모르는 힘에 의해 어느날 갑자기 그토록 그리워 했던 아버지의 곁으로 가게 된다.

 

왕이 된 소년의 나이 불과 마흔 여덟,
그가 조금 더 살아서 그를 가장 사랑해주던 그의 할아버지 만큼만 더 살았어도 그래서 이 땅을 그의 그림처럼 바꿀 수 있었다면 머지 않은 훗날 국모를 시해당하는 수모도 나라를 잃는 망국의 도탄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생각이 많다. 바꾼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핸드폰 하나 바꾸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하물며 사람 바꾸는 게 쉬울 수는 없을 터...

다음에 가슴이 조금 더 열리고 세월호 아이들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더 희미해지면 여기 이곳, 아름다운 숲향이 있고 그늘이 있어 좋은, 나를, 우리를 뒤돌아보며 사람을 생각하게 해줘서 더 좋은 화산(花山)을 다시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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