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한 여자와 겨울. <러브레터>는 로맨틱 코미디의 계절인 봄과 진한 로맨스의 계절인 가을을 딛고 겨울을 멜로의 계절로 각인시킨 영화다.
사계절 중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을까. 따스한 날씨와 흩날리는 꽃잎도, 뜨겁게 쨍한 햇살 아래 시원하게 즐기는 물놀이도, 색색으로 물드는 낙엽도 없다. 겨울은 추위와 눈뿐이다. 어릴 때야 눈사람 만들고 눈싸움하는 재미가 있었고, 좀 커서는 스키나 보드 같은 겨울 스포츠를 즐겼다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을 느끼는 나이에 접어들면 겨울은 그저 이불 밖으로 나서는 게 무서운 계절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분명 겨울은 겨울만의 매력이 있다. 특히 산을 타는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순백의 눈으로 뒤덮인 겨울 산은 춥고 위험해도 다가가게 되는 마성의 존재다. 아마영화 <러브레터>의 후지이 이츠키 또한 겨울 산의 매력에 빠졌던 인물일 것이다. <러브레터>가 제작된 것이 1995년, 국내 공식 개봉한 것이 1999년이니 이미 20여 년이 된 영화인데도 아직도 겨울 영화로 꼽히는 명작인 것엔 이유가 있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설원에 누워있는 여자를 지켜보는 오프닝의 롱테이크 신부터 예감하게 된다. 이 영화, 겨울을 제대로 담겠구나. 이 영화로 겨울을 애틋하게 여기게 되겠구나.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는 겨울 산에서 조난사고를 당해 세상을 뜬 후지이 이츠키라는 인물의 추도식으로 시작된다. 후지이 이츠키와 결혼을 약속했던 연인 와타나베 히로코는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 이츠키를 마음에서 지우지 못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츠키의 중학교 졸업 앨범을 본가에서 우연히 보게 되었을 때, 이미 집이 헐리고 국도로 바뀌었다는 이츠키의 옛날 집 주소를 적어놓곤 “잘 지내고 있나요? 전 잘 지내고 있어요”라고 편지를 쓴 것은. 하늘에 있는 연인에게 보낼 길 없는 자신의 마음을 하염없이 보내는 그 심정,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그 편지에 답장이 왔다! 후지이 이츠키라는 이름으로, “저도 잘 지내요. 감기 기운이 좀 있지만”이라는 내용으로. 미스터리인가 싶겠지만 실상은 단순했다. 히로코의 연인 후지이 이츠키가 다닌 중학교에 후지이 이츠키라는 동명의 여학생이 있었던 것. 그녀를 만나고 싶은 마음, 그리고 히로코가 이제는 후지이 이츠키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했으면 하는 선배 아키라의 마음이 겹쳐 히로코는 동명의 후지이 이츠키를 만나러 오타루로 떠난다. 그리고 우연히, 히로코는 연인 후지이 이츠키의 동창 후지이 이츠키가 자신과 꼭 닮은 외모임을 알게 된다. 후지이 이츠키는 히로코를 처음 만났을 때, 내성적인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첫눈에 반했다고 사귀자고 했었다. 혹시 옛날 첫사랑과 외모가 닮아서 사귄 건가? 그렇다면 용서할 수 없다며 연인 후지이 이츠키의 어머니 앞에서 눈물 흘리는 히로코. 그러니 히로코가 오타루의 후지이 이츠키에게 “당신의 추억을 나눠 주세요”라며 연인 후지이 이츠키에 대해 말해 달라고 편지를 쓴 건 당연해 보인다. 연인은 정말 동명의 소녀를 좋아했을까? 그는 어릴 적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런 복합적인 궁금증이 생겼으리라.
영화는 고베에 사는 히로코와 오타루에 사는 이츠키가 편지를 교환하며 어린 소년 소녀였던 이츠키의 과거를 소환한다. 오타루의 이츠키는 소녀 시절 동명의 소년 이츠키의 존재 때문에 중학 시절 내내 놀림 받은 기억만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히로코의 요청으로 기억을 더듬어 볼수록 의외로 많은 추억이 되살아난다. 반 친구들의 장난으로 함께 도서부장을 맡았던 일, 도서실에서 하얀 커튼이 흩날리는 창가에서 우수에 젖은 모습으로 책을 읽던 소년 이츠키의 모습, 바뀐 시험지를 돌려받기 위해 자전거 주차장에서 어둠이 내릴 때까지 기다렸던 일, 누구도 읽지 않는 책만 골라 도서 카드에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던 소년 후지이 이츠키의 독특한 취미, 사고로 예정돼 있던 달리기 경주에 나가지 못한 소년 이츠키가 붕대를 감고 대회장에 난입해 달리던 모습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자신의 모습 등등.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는 소년 이츠키가 소녀 이츠키를 좋아했음을, 그리고 소녀 이츠키 또한 소년 이츠키에게 끌렸었음을 알게 된다.
그 각성은 차마 연인을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했던 고베의 와타나베 히로코 또한 마찬가지. 그리하여 아직도 회자되는 그 유명한 장면이 등장하는 것이다. 연인 후지이 이츠키가 조난당한 산을 바라보며 히로코가 외치는 장면. “오겡키 데스카? 와타시와 겡키데스!” 잘 지내고 있나요? 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설원에서 연인이 떠난 산을 바라보며 이 평범한 인사말을 오열하듯 외치며, 히로코는 서서히 연인을 마음에서 떠나보낼 준비를 한다. 눈 쌓인 오타루의 아름다운 풍광, 모든 것을 눈 속에 품고 아무 말이 없는 겨울 산의 고요함, 이와이 슌지 감독 특유의 아련하고도 감성적인 화면, 그리고 그 영상에 어울리는 감미로운 OST까지, 히로코의 ‘오겡키 데스카’ 장면은 겨울의 아름다움과 쓸쓸함, 아련함을 한몸에 담은 <러브레터>의 절정이라 할 수 있겠다.
재미난 건 히로코가 온몸으로 소리치며 연인을 떠나보내던 순간, 교차 장면으로 오타루의 후지이 이츠키를 보여주는 거다. 중학 시절 은사로부터 소년 후지이 이츠키가 2년 전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츠키는 감기가 악화되어 쓰러졌다. 병원에서 눈을 뜨는데, 그 순간의 히로코처럼 조용히 “잘 지내고 있나요? 전 잘 지내고 있습니다”를 되뇐다. 히로코가 자신에게 어떤 심정으로 편지를 보냈는지 알았고,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과거 자신도 소년을 좋아했음을 은연중 깨닫게 된 것.
그리고 그 마음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확인된다. 후배 도서부 소녀들이 찾아와 책 한 권을 내미는데, 그 책은 소년 이츠키가 전학 가기 전 소녀 이츠키에게 반납을 부탁했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으나 그때 발견하지 못했던 도서카드 뒷면에는 소년이 그린 소녀 이츠키의 초상이 그려져있었던 것. 영화 말미 이츠키의 왈칵하는 표정과 함께 흐르는 내레이션 “가슴이 아파서 이 편지는 보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또한 “오겡키 데스카”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에게 기억되는 명대사이다. 너무나 뒤늦게 첫사랑을 확인한 이츠키의 아련한 감정이 보는 이의 심장을 흔들었으니 말이다. 화려한 꽃이 없어도, 신록이 무성한 나무가 없어도, 색색으로 단풍이 든 숲이 없어도, 눈으로 뒤덮인 산과 풍경이 얼마나 감성적일 수 있는지 보여준 <러브레터>. 개봉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겨울 영화하면 <러브레터>가 떠오를 만큼 영화의 여운이 짙게 남아있다.
※ 본 콘텐츠는 산림청 격월간지 '매거진 숲'에서 발췌한 기사입니다.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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