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에 있는 불명산(428m) 화암사를 사랑한 안도현 시인은 절 이름 앞에 “잘 늙은 절”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한 번쯤 화암사를 찾은 사람이라면 그 표현에 쉽게 동의할 것입니다. 화암사는 오래된 절이지만 추하지 않은 모습으로 항상 편안하게 맞이해주거든요. 개인적으로 화암사를 자주 찾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가는 길에 만나는 나무와 숲이 좋아서입니다. 화암사가 기대어 있는 불명산은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지만, 숲이 울창해 깊은 산속에 와있는 느낌이 듭니다. 잘 늙은 숲과 잘 늙은 절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싱그랭이마을 시무나무
화암사를 찾아 나선 길은 절을 만나러 가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나무를 관찰하고 숲을 걷기 위해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절을 가기 위해서는 요동마을을 통과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싱그랭이마을’이라고 불렀던 마을입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커다란 ‘시무나무’ 한 그루가 장승과 솟대들의 호위를 받고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무나무는 우리나라, 중국, 몽골에 자생하는 나무입니다. 길 안내판이 없던 시절에는 20리마다 시무나무를 심어 거리를 알려주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잠시 차에서 내려 안부를 묻고 마을 길로 들어섭니다.
마을 옆으로는 천이 흐르는데 천변에는 커다란 ‘느티나무’들이 심겨 있습니다.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서 심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끝에는 수령이 500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습니다. 보호수로 지정된 당산나무입니다. 마을에서는 이곳에서 정월보름제를 지내고 주민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화합을 다짐한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나무의 역할이 참으로 다양합니다.
싱그랭이마을을 지나 올라가 숲속으로 들어서면 이내 화암사 주차장에 다다릅니다. 화암사로 들어가기 전에 습관적으로 반대편 산을 바라봅니다. 오늘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서입니다. 이곳을 찾을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거든요. 지금은 나목(裸木)이 된 활엽수와 산등성이로 밀려난 소나무의 영역 다툼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시기입니다.
-화암사 숲길 겨울 풍경
다시 몸을 돌려 화암사로 오르는 숲길을 바라보면 오른쪽 경사지에 우람한 근육질의 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사천왕상을 연상시키는 나무인데, ‘서어나무’입니다. 숲의 천이(遷移) 과정 가장 마지막 단계에 나타나는 나무랍니다. 서어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것은 숲이 훼손되지 않고 오랫동안 잘 보존되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가다 보면 산죽(山竹)을 심심찮게 만나는데 이 또한 숲의 천이 상층 단계에서 나타나는 나무입니다. 산죽은 ‘조릿대’라고도 부릅니다. 줄기를 이용해서 쌀을 씻을 때 쓰는 조리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화암사 가는 숲길은 오래된 나무들이 만들어 놓은 길입니다. 굳이 나무 이름을 더 거론하지 않아도 몸으로 느낄 수 있답니다.
겨울 숲길을 걸으면서 좋은 것은 나무를 속속들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뭇잎이 무성한 경우에는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부분들까지 다가갈 수 있답니다. 어떤 나무는 속이 텅 비어 서 있는 것조차 힘들 텐데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나무의 그런 강인한 생명력을 보면서 다시 한번 기운을 내자고 다짐을 합니다.
개울가 버드나무도 비록 허리는 굽었지만 기세는 아직도 당당합니다. 노년에 몸을 굽히고 살더라도 자존심은 굽히지 말고 살라고 이르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나무는 뿌리가 땅 밖으로 나와 나무줄기만큼 굵어져 있습니다. 뿌리를 땅속으로 내리기 곤란한 지형인가 봅니다. 나무는 스스로 자기가 설 자리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비와 바람에 의존하고 때로는 동물에 의해서 살 곳이 정해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나무가 선택하는 것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나무는 어떤 악조건에서도 살아갈 방법을 찾아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장면입니다.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뻗어 올라간 굴참나무입니다. 날씬한 몸매가 아름답습니다. 그렇지만 이곳에도 생존전략이 숨어있습니다. 공간이 많은 지역에 있는 참나무류를 보면 가지가 무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지가 많아야 많은 꽃을 피워 번식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공간이 좁은 숲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햇빛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서 세를 불리는 것보다 키를 키우는 전략을 사용하게 됩니다. 숲속에 있는 나무들이 대체로 날씬한 이유이기도 하지요.
숲길 옆 계곡에는 겨울이 두껍게 내려앉았습니다. 계곡을 감싸고 있는 얼음 아래로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직 봄을 얘기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지만, 계곡 물소리가 봄을 부르는 소리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번에는 폭포 물소리입니다. 폭포가 보인다는 것은 화암사에 가까이 왔다는 의미입니다. 폭포 바로 위쪽에 절이 있으니까요. 폭포 앞에는 늙은 고로쇠나무 한 그루 있습니다. 몸에는 수액을 뽑은 자국이 여기저기 남아있네요. 아름답지 않은 장면입니다. 이제는 늙은 고로쇠나무를 좀더 편안하게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화암사로 오르는 옛길은 폭포 왼쪽 절벽 길이었습니다. 폭포를 가로질러 놓인 철제 계단이 생기면서 이제는 많이 이용하지 않는 길이 되었답니다. 계단 입구에 서면 빛바랜 화암사 표지판이 인사를 합니다. 화암사에는 일주문이 없는데 이 표지판이 그것을 대신합니다.
주차장에서 절까지는 700여 m밖에 되지 않습니다. 해찰하지 않고 걸으면 15분 정도면 도착하는 거리입니다. 여유를 가지고 걸어도 좋은 거리이지요. 숲도 보고 나무도 보고 계곡 물소리를 감상하면서 가능한 한 천천히 걸어 절 바로 아래에 도착했습니다. 돌계단 위쪽에 절 이름을 닮은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화암사의 자랑 국보 극락전
돌계단을 오르면 급하게 절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측 등산로를 따라 언덕에 올라 화암사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아담하고 조용한 절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거든요. 언덕을 내려가 우화루 앞에 서면 매화나무 한 그루 볼 수 있습니다. 화암사에 봄을 알리는 전령사입니다.
우화루 옆으로 난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국보 제316호인 극락전이 정면에 보입니다. 조선 선조 38년(1605년)에 지은 건물인데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하앙식 구조물입니다.
하앙은 기둥과 지붕 사이에 끼운 긴 목재를 말합니다. 처마와 나란히 경사지게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처마와 지붕의 무게를 고르게 받쳐주는 효과가 있답니다. 앞쪽 하앙에는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고 건물 뒤쪽 하앙은 꾸밈없이 뾰족하게 마무리했습니다.
절 뒤쪽 언덕에도 늙은 매화나무 몇 그루가 있습니다. 봄이 되면 절 주변이 온통 매화꽃 향기로 덮이겠습니다.
절 안에는 또 하나의 특별한 나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원산지인 노간주나무입니다. 전국 산야에 분포하고 있어 쉽게 볼 수 있는 나무지만 이렇게 큰 나무를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금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여름에 제모습을 선명하게 들어내는 산딸나무숲도 있습니다. 명부전 뒤쪽 계곡이 여름마다 산딸나무꽃으로 하얗게 물듭니다.
-다시 찾고 싶은 불명산 화암사
완주 불명산 화암사는 안도현 시인의 표현과 똑 닮아 있습니다. 아담하면서 조용한 잘 늙은 절 맞습니다. 그 절을 찾아가는 숲길 역시 잘 늙은 아름다운 숲입니다. 겨울 숲을 걸으며 나무들의 많은 특징을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화암사에서 국보인 극락전을 다시 만난 것도 의미있었고요. 봄이오면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지요? 얼레지꽃, 매화 향기가 날리는 계절에 다시 찾고 싶은 숲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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