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est 소셜 기자단 -/2019년(10기)

풍류객들의 명승지에서 순교성지가 된 절두산

대한민국 산림청 2019. 4. 17. 17:00




 서울 한강변에는 전국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이름을 가진 봉우리가 솟아있다. 절두산(切頭山, 서울시 마포구 토정로 6 (합정동))은 원래 봉우리 모습이 누에의 머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잠두봉(蠶頭峰)이라 부르던 곳이다. 바로 아래 있었던 양화진 나루터 주변은 잠두봉과 어울려 이름난 명승으로 많은 풍류객과 문인들이 뱃놀이를 즐기면서 시를 지었던 곳이기도 하다. 



겸재 정선이 그린 잠두봉 <양화환도> 



양화진은 버드나무가 많아 ‘양화(楊花)’란 이름이 붙은 옛 나루터다. 겸재 정선이 <양화환도 (楊花喚渡)>를 남길 만큼 경치가 빼어난 곳이었다. 그림 왼편이 잠두봉이고 강 건너 오른편은 현재의 선유도 공원에 있었던 선유봉이다.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사신들이 잠두봉 봉우리에 올라가 구경을 하면서 주변 경치가 중국의 적벽(赤壁)이나 다름없다고 감탄을 했다는 이곳이 순교의 성지가 된 사연은 흥선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사건(병인박해)에서 비롯된다. 서학(西學)으로 불린 천주교는 당시 ‘사학(邪學)’으로 몰려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1967년 한강변의 절두산 사진. 오른편에 사람이 살고 있었던 밤섬도 보인다.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기리는 무명비 



1866년 2월 프랑스군함이 천주교탄압을 문제 삼아 한강을 거슬러 바로 서울 턱밑인 양화진과 서강 나루터까지 침입했다. 이에 대원군은 “양이로 더럽혀진 한강을 서학쟁이들의 피로 씻어라”라는 구호 아래 양화진에서 천주교도의 목을 베기 시작했다. 버들꽃 만발하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양화 나루터는 이때부터 사형장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 뒤로 잠두봉은 머리를 잘랐다하여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


한국 최초의 신부(神父)였던 김대건 신부 



다산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도 이때 용산 새남터에서 처형됐다. 절두산에서의 처형은 무지막지한 선참후계(先斬後啓)였다. ‘일단 먼저 머리를 자르고 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곳 순교자들에 관한 기록은 29명 외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김훈 작가는 이곳에서 영감을 받아 구한말의 천주교를 다룬 역사소설 <흑산(黑山)>을 쓰기도 했다.



병인박해를 상징하는 조형물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후 순교자들의 넋이 서려 있는 이곳을 성지로 조성하였고, 병인박해 100주년이 되던 1967년 성당과 박물관이 준공되었다. 한강 유일의 원형 보존지역인 이곳은 1997년 우리역사의 중요한 유적지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 사적 제 399호(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로 지정되었다. 




걷기 좋은 절두산 강변 산책로

마음을 경건하게 하는 조형물 




절두산 순교성지의 묘미는 나무들이 우거진 한강변 오솔길이다. 소나무와 잣나무, 좀작살나무, 청단풍 등 여러 나무들이 촘촘히 서있는 오솔길을 따라 한가로이 거닐며 경쾌하게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소리를 듣다보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오른편으로 빛나는 한강 물빛에 또 다시 고요한 마음의 평화를 담을 수도 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


절두산 자락엔 이역만리 아시아의 먼 곳까지 와서 선교를 하다가 이 땅에 묻힌 150여명의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지공원이 차분하게 어우러져 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이다. 특별히 신앙이 없는 내게도 종교를 떠난 경건함과 비석에 새겨진 고인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1890년에 생겨난 이국적인 묘원  




우리나라 공동묘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드는 건, 무덤마다 지키고 서있는 다양한 모양의 비석들 때문이다. 십자가 모양에서 네모반듯한 묘비가 있는가 하면 울퉁불퉁한 자연석처럼 생긴 것들도 있다. 눈이라도 내리면 묘지위로 하얀 눈이 이불처럼 쌓여서 무덤가의 분위기가 황량하지 않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서울시 보호수로 지정된 장대한 노거수 느티나무가 수호신처럼 묘원 주변에서 든든하게 서있다.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무덤을 돌며 상세히 설명을 해주는데, 어릴 적 국사 교과서에서 접했던 아펜젤러, 언더우드, 베델 등의 친근한 이름들이 들려와 귀가 쫑긋 선다. 특히 고인들이 주로 활동하던 때가 19세기 후반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기 전후 격동의 시기인 점도 호기심을 느끼게 했다. 더구나 몇몇 비석엔 심상치 않은 상흔이 있어서 물어보니, 1950년 한국전쟁 때 전투 중에 생긴 총탄자국이란다. 지난한 우리 역사의 거친 숨결이 실감났다. 




 한국전쟁 때의 총탄 상흔이 남아있는 비석 



외국인 선교사 묘지가 조성된 때는 1890년으로, 처음 묻힌 사람은 존 헤론 (John W. Heron)이라는 분이다. 선교사이자 의사인 헤론은 당시 창궐하는 천연두, 콜레라 같은 전염병으로 마구 죽어나가는 조선 사람들을 보다 못해 일선에서 열심히 치료하다가 그 자신이 전염병 이질에 걸려 1890년 33살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비석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고 적혀있는 무덤의 주인은 헐버트 (Homer B. Hulbert)로 한국 YMCA를 창설하여 교육과 계몽활동을 하였다. 1905년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는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밀사를 워싱턴에 보냈는데 그가 바로 헐버트다. 그는 1907년 이준 등과 함께 헤이그에도 밀사로 파송되었다. 해방 후인 1948년 84세의 고령의 나이에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으로 초대되어 광복된 한국이 보고 싶어 왔다가 불귀의 몸이 되고 말았다.



19세기 격동의 나라에서 살다 간 선교사들 



영국의 특파원으로 내한했다가 항일 언론 투사가 된 분도 이 묘역에 잠들어 있는데 바로 베델이다 (Ernest T. Bethel). 1904년 한글, 영문판의 항일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일본의 침략행위를 맹렬히 비판 규탄하는가 하면, 을사조약 후 고종 황제의 친서를 게재하여 일본의 침략만행을 국내외에 폭로한 사람이다.


1908년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쏘아 죽인 전명운과 장인협의 거사를 찬양하는 보도를 낸 후 결국 일제에 의해 상하이로 국외추방을 당하고 일 년 후 돌아왔으나 이미 심신에 깊은 병이 나서 37세의 아까운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나는 죽지만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양화진 외인 묘지에 묻히는 날 추도식에 참석한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영국인인 베델 씨가 우리나라에 바친 것이 이와 같을진대 어찌 우리가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열변을 토하셨다고 한다.




선교사 묘지공원에 묻혀 있는 유일한 일본인 무덤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우리 정부의 문화훈장을 받은 사람, 일본이라면 무조건 적대시하던 일제 강점기 때에도 한국 고아의 아버지로 존경 받던 일본 사람도 묻혀 있다. 이름은 '소다 가이치'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에 묻혀 있는 유일한 일본인이다. 


1905년부터 1945년 해방 때 까지 40년간 아내와 함께 한국 땅에  살면서 1000여 명의 고아를 자식처럼 돌보았다. 1961년 한국으로 돌아와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받았고 다음 해 이곳에 묻혔다. 묘원 한편에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이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언 손 품어주고 / 쓰린 마음 만져 주니 / 일생을 길다 말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 고향이 따로 있든가 / 마음 둔 곳이어늘









※ 본 기사는 산림청 제10기 블로그 기자단 김종성 기자님 글입니다. 콘텐츠의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내손안의_산림청,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