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est 소셜 기자단 -/2020년(11기)

역사를 찾아서 걷는 길 – 전북 완주 웅치 전적지 탐방로

대한민국 산림청 2020. 7. 29. 16:00

 

산은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까운 역사에서부터 까마득한 먼 이야기까지 산은 차곡차곡 담아두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전북 완주지역에서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가는 길입니다. 이번에 찾아간 곳은 임진왜란 당시 위대한 전투로 알려진 완주 소양면에 있는 웅치 전적지 탐방로입니다.  

 

 

 

 

웅치 전투 이야기

 

임진왜란은 1592년 4월에 시작해서 7년간에 걸쳐 두 차례 침입한 일본과의 전투를 말합니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해서 2달 만에 함경도까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임금인 선조는 의주로 피신을 가서 왜군은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남해는 이순신 장군의 선방으로 일본군 배가 묶여 보급로가 차단되고, 8도에서 의병이 일어나면서 육지에서의 물자 확보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본군은 곡창지대인 전라도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충남 금산을 지나 이치(梨峙, 대둔산 부근)와 웅치(熊峙. 진안과 완주 경계)를 통해서 전주로 들어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웅치 전투가 먼저 있었는데요. 조선 관군과 의병, 승병, 주민이 힘을 합해 웅치 전투(웅치, 전주 안덕원)에서 2만여 일본 군사를 물리치게 됩니다. 웅치 전투의 승리는 이치 전투 승리로 이어질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전라도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은 “若無湖南약무호남 是無國家시무국가”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당시 호남을 지키지 못했다면 조선은 없어졌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웅치 전적비

 

전주에서 진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산을 넘어야 합니다. 현재는 26번 국도가 보룡재를 지나는데요. 그 이전에 사용했던 길은 모래재를 굽이굽이 돌아 넘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처음 신작로가 났던 곳은 곰티재(웅치)를 지나는 길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만든 좁은 길입니다.

 

 

 

 

이 좁은 길은 아직도 비포장 상태로 그대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먼저 웅치 전적비를 보기 위해 차를 이용해서 곰티재까지 이동했습니다. 구불구불 돌아서 가는 길은 자연의 정취를 고스란히 느끼게 해줍니다.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이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79년에 세운 웅치 전적비는 곰티재에서 150m 위쪽에 있었습니다. 실제 웅치 전투가 있었던 곳은 이곳이 아닌데 당시에는 일제강점기 때 만든 곰티재를 넘는 길이 웅치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판단해서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웅치 전적지

 

답사 일행은 웅치 전적비를 보고 실제 웅치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가기 위해 탐방로를 따라 북쪽으로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전투가 있었던 장소는 조선시대 당시 공로(公路, 원님 가마나 진상품이 오가던 길)가 지나던 곳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신작로 이전에 전주와 진안을 오갈 때 이용했던 길이지요.

 

 

 

 

처음에는 오르막 계단길입니다. 계단길 끝에서 산봉우리로 올라가 내려가는 방법도 있지만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봉우리 근처에서 우회해서 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좁은 우회로를 돌아서 빠져나가면 바로 내리막길이 시작됩니다.

 

 

 

 

웅치 전적지가 있는 곳까지는 주변 식물을 관찰하면서 걸었습니다. 동행한 멤버 중에 생태해설사가 있어 중간중간 나무나 풀에 관해서 설명도 해주었습니다. 덕분에 공부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산나물, 누리장나무, 개진달래를 비롯해서 산가막살나무, 덜꿩나무, 자귀나무, 계피나무, 좀작살나무 등의 특징을 상세히 설명해 주어 식물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웅치 전적지가 가까워오면서 산 아래에 펼쳐진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른쪽이 진안(덕봉마을) 방면에서 웅치를 넘어오는 길입니다. 지금도 이 골짜기를 웅치골로 부르고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이 웅치였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덕봉마을 입구는 진안에서 유명한 메타세쿼이아 길과 만납니다.  

 

 

 

 

웅치 전투는 골짜기 마을 입구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마을 입구에는 냇가가 흐르고 있어 자연스럽게 해자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하천의 이름이 본래는 적천(笛川)이었으나 지금은 적래천(敵來川, 일본군이 들어온 하천)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적천(笛川) 앞에 제1방어선을 두고 제2, 제3 방어선을 구축하여 적의 진입을 저지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계곡을 통과하는 길이기 때문에 적은 병사로 많은 적군을 방어하기에 좋은 요새였습니다. 그렇지만 1,400여 명으로 2만 대군을 무찌를 수는 없었습니다. 조선군은 방어선이 차례로 무너지면서 최후 방어선인 웅치에서 정담 장군 부대와 진안 출신인 김수 형제 의병들을 포함한 600여 명이 적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고 순절하게 됩니다.

 

웅치 주변에는 돌무더기가 군데군데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최근 발굴 조사를 통해 성황당 터로 불렸던 돌무더기가 웅치 전투에서 순직한 조선군 무덤이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채취한 흙의 총 인 성분과 칼슘 성분이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게 나왔답니다. 그 소중한 역사의 현장을 확인하고 일본군이 지나갔을 그 길을 따라 전주 방향으로 내려왔습니다.

 

 

 

 

웅치 전적지 탐방로

 

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길가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만납니다. 바위 속에는 자갈들이 박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마이산에서 보았던 것과 닮은 역암(礫巖)입니다. 이 바위를 왜장바위라고 부릅니다. 마을 주민들의 구전에 의하면 웅치 전투 당시 정담 장군이 능선을 넘어오던 백마를 탄 왜장을 이곳에서 잡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내려가는 길은 조선시대 공로(公路)가 지나던 곳이지만 옛길은 대부분 숲속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옛길 발굴 작업을 하면서 깃발로 표시해 놓아 옛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산이 경사가 있어 굽이굽이 돌아서 내려가는 길이지만 옛 공도가 지날 만한 지형이었습니다. 옛 길이 복원되어 웅치 전적지 탐방로는 옛길을 따라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간에 나무가 훼손된 안타까운 장면도 보았는데요. 껍질이 벗겨진 나무가 여럿 있었습니다. 벌통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껍질을 벗겨 사용해서 그렇답니다. 다행히 일부 회복되기는 했지만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반대로 흐뭇한 장면도 있었습니다. 연리목(連理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종의 나무가 한 몸이 되어 서로 의지하고 자라고 있습니다. 연리목(지)은 사랑을 상징하고 있어 산행을 하면서 만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웅치 전적지 탐방로…

 

두목(杜木)마을 입구로 내려와 웅치 전적지 탐방을 마무리했습니다. 두목마을 주민의 안내가 있어 웅치 전적지를 상세히 돌아볼 수 있었던 의미 있는 산행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전주성 방어의 초기 작전으로 진행된 웅치 전투에서 왜군에게 많은 피해를 줌으로써 이후 있었던 전주 안덕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웅치가 있어 호남이 있을 수 있었고, 호남이 있어 나라가 있게 되었습니다. 역사적 가치가 높은 웅치 전적지 탐방로가 잘 다듬어져 많은 사람들이 찾을 수 있길 기대합니다.

 

 

 

※ 본 기사는 산림청 제11기 기자단 김왕중 기자님 글입니다. 콘텐츠의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