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의 신분으로 사대부 집안의 선산에 묻힌 홍랑(洪娘). 그녀는 사랑하는 마음의 정표로서 묏버들을 소재로 삼은 시를 임에게 읊어줬는데, 묏버들은 자신을 잊지 않음은 물론 자신만을 사랑해 달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천민의 신분으로 양반집 선산에 묻힌 기녀가 있다. 그녀는 조선 선조 때 함남 홍원 출신의 이름난 기생이며 여류시인이었던 홍랑(洪娘)이다. 기생으로는 유일하게 사대부의 족보에까지 올라간 홍랑. 현재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에 위치한 해주 최씨의 문중 산에 그녀의 무덤이 있다.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에 있는 무덤이 그것이다.
기생은 유교적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에 노비나 다름없는 천민이었다. 기생 홍랑은 조선시대의 시대적 질곡을 뛰어넘어 어떻게 양반 사대부 집안의 문중 산에 묻힐 수 있었을까. 아이러니한 역사가 궁금증을 낳게 한다. 이유인즉, 최경창과의 애틋한 사랑이 해주 최씨의 문중까지 감동시켰기 때문이었다. 최경창을 향한 홍랑의 마음은 사별한 후에도 절개를 지키듯 더욱 애절했다. 그래서 천민의 신분이었지만 해주 최씨 문중 산에 그녀를 머물게 했던 것이란다. 홍랑과 최경창의 애틋한 사랑은 무덤 옆의 비석에 새겨진 홍랑의 한글 시조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에게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잎이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임에게 바친 사랑을 묏버들로 구상화시킨 이 시조는 최경창을 향한 홍랑의 순수하고 청아한 마음의 표시이다. 비록 사랑하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버들가지에 새잎이 돋아나듯이 자신을 기억하며 그리워해 달라는 홍랑의 아쉬움이 애절하게 표현돼 있다. 임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을 비유를 통해 솔직하게 나타낸 시조다. 또한 천 리의 먼 거리로 떨어져 있어도 임에게 바치는 순정은 묏버들처럼 항상 임의 곁에 있겠다는 뜻과 함께 임(최경창)은 자신(홍랑) 이외의 여인에게 한눈을 팔지 말라는 부탁이 깃들어 있다. 이 시조는 홍랑이 읊었으나 최경창이 「번방곡(飜方曲)」이라 하여 다음과 같은 한시로 번역해 주기도 했다.
절양유기여천리(折楊柳奇與千里)
인위아시향정전종(人爲我試向庭前種)
수지일야신생엽(須知一夜新生葉)
초췌수미시첩신(憔悴愁眉是妾身)
기녀 홍랑은 묏버들로 애틋한 사랑 표현
임을 향한 사모의 정을 버들가지를 빌어 표현한 홍랑의 한글 시조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이 시조는 1936년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가 홍랑의 시가 실린 서첩의 발문에서 홍랑의 친필로 확인함과 아울러 시조의 내용과 표현을 높게 평가해서인지 지금도 여전히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시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여러 연구자들이 홍랑의 시를 높이 평가한 까닭은 이별과 관련된 시는 많지만 이만큼 멋이 살아 있고 낭만적인 작품은 흔치 않기 때문이란다. 홍랑의 시가 실린 서첩이 2000년 11월에 공개된 바 있는데, 이 서첩에는 그동안 알려져 있던 홍랑의 시뿐만 아니라 최경창이 홍랑과의 사랑을 통해 남겼다는 시도 함께 수록돼 있다. 게다가 최경창은 이 서첩의 말미에 홍랑과 나눈 만남과 이별의 이야기를 직접 기록해 놓았다. 그렇다면 홍랑의 사랑과 이별은 어떤 감동으로 그려졌고 표현됐을까.
홍랑은 관아의 관기로서 기생의 비천한 신분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교양과 미모를 겸비했으며, 문학적 소양과 재주는 유명한 시인가객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았다. 또한 그녀는 기생이었지만 몸을 함부로 놀리지도 않았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운명적으로 만나 정절을 바치기 위해서였을까. 이런 홍랑의 아름다운 재색과 지혜는 마침내 당시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명성이 높았던 최경창을 만나면서 변하지 않을 뜨거운 사랑으로 그려졌다.
최경창이 과거에 합격한 시기는 1568년이고, 홍랑을 만나 사랑을 시작한 시기는 그로부터 5년이 지났을 때였다. 최경창이 홍랑과의 사랑을 서첩에 남긴 기록은 바로 이때부터 시작된다. 최경창은 1573년(선조 6년)에 함북 경성(鏡城)의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하게 됐고, 어느 날 홍랑의 노랫가락을 듣는 것으로 운명적 만남이 이뤄졌다. 그후 그들의 농밀한 사랑은 날이 갈수록 더욱 뜨거워졌다. 결국 홍랑은 군사작전을 수행하는 막중(幕中)에서 최경창과 함께 기거하며 부부처럼 정을 쌓아갔다. 그러나 이듬해 봄에 이별이라는 엄청난 시련이 찾아왔다. 임기가 끝난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최경창의 상경은 홍랑에게 있어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연인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뜻밖의 이별은 눈물샘을 자극하기 마련이다. 홍랑 역시 이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심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홍랑은 이별의 길목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바로 길 옆의 버들가지였다. 홍랑은 슬픔을 참아내며 버들가지를 꺾어 최경창에게 주며 한글로 시조 한 수를 구슬프게 읊었다. 이 시조가 그 유명한 「묏버들 가려 꺾어」다. 최경창은 서첩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나와 이별한 뒤 홍랑이 함관령(咸關嶺)에 이르렀을 때에 날이 저물고 비가 내렸다. 이곳에서 홍랑이 내게 시를 지어 보내왔다"고.
홍랑의 시조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임에게 바치는 순정은 잎이 시들었다가도 봄이 되면 일찍 새잎을 내미는 묏버들처럼 항상 그의 곁에 있겠다고 다짐한 내용이다. 홍랑은 임이 떠난 후 그리움으로 눈물의 세월을 보냈을 것이다. 짐작은 뻔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뒤로 하고 떠나온 최경창 역시 그리움이 떠나질 않았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서울로 돌아온 최경창은 얼마 안 있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곧바로 서울을 향해 길을 나섰다. 1주일 만에 서울에 도착한 홍랑은 병석에 누워 신음하는 최경창을 다시 만나 그의 곁을 지켰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병수발을 들었다.
임은 난초로서 홍랑의 사랑에 화답
그런데 최경창의 건강이 차츰 회복될 때였다. 최경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더니, 이 때문에 1576년(선조 9년) 사헌부에서 양계의 금(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의 서울 출입을 제한하는 제도)을 어겼다는 이유로 최경창은 파직당하고 말았다. 홍랑은 나라의 법을 원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경성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명종왕비인 인순왕후의 국상 중이라 홍랑의 일이 최경창에게 더욱 악재로 작용했다.
결국 두 사람의 재회는 파직과 이별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최경창은 자신을 향한 홍랑의 지극한 사랑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가슴 깊이 새기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송별」이란 시에 담아 떠나는 홍랑에게 주었단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幽蘭)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랴
함관령에 올라 옛 노래를 부르지 마라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최경창은 경성에서 이별할 때 버들가지를 꺾어 주며 이 가지를 자신처럼 여겨 달라고 했던 그녀의 마음에 난초 한 포기를 건네는 것으로 화답했다. 최경창 자신의 애끓는 심정과 쓸쓸한 홍랑의 마음을 위로했던 것이다. 최경창은 파직을 당한 후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가 1583년(선조 9년) 45세의 젊은 나이로 객사하고 말았다. 그러자 홍랑은 크나큰 슬픔을 가다듬고 최경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에 당도한 후 무덤 앞에 움막을 짓고 씻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으며 묘를 지켰다. 그때 홍랑은 다른 남자의 접근을 막기 위해 자신의 얼굴을 칼로 긁어 못생긴 추녀로 만들었다. 조선 중기의 학자 남학명(南鶴鳴)은 문집 『회은집(晦隱集)』에서 최경창이 죽은 후 홍랑의 행동을 적고 있는데, "최경창이 죽은 뒤 홍랑은 스스로 얼굴을 상하게 하고 그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3년간의 상을 마친 뒤에도 임의 무덤을 떠나지 않은 채 그의 영혼 앞에서 살다가 죽으려 했다. 그러나 하늘은 그녀에게 그런 작은 행복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임의 무덤 곁을 떠나야만 했다. 『회은집』은 “난리가 일어나자 홍랑은 최경창의 시를 지고 피난해 화를 면하게 했다”고 적고 있다.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살랐던 홍랑은 전쟁이 끝난 뒤 해주 최씨 문중에 최경창의 유작을 전한 후 그의 무덤 앞에서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현재 홍랑의 무덤 옆에는 1980년대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세운 홍랑가비가 서 있는데, 돌로 만든 이 가비는 마을 뒤편에 세워졌던 것을 나중에 묘역 옆으로 옮긴 것이다. 하나의 비석에서 앞면을 고죽시비, 뒷면을 홍랑가비라고 한 것은 살아서는 만남과 이별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사랑이 죽은 후에라도 영원히 함께하라는 뜻이 있는 듯하다. 거기에는 임을 사모하는 마음의 정표 또는 사랑의 매개체로서 묏버들이 한몫하고 있다. 지금 산야에는 버들가지에 물이 올라 막 피어나려는 참이다.
< 송홍선 민속식물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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