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줄기가 하늘 높이 뻗은 백두산 소나무들은 아름다운 여인이란 뜻의 미인송이라 이름하고, 곧게 자라는 열녀수는 절개를 꺾지 않거나 정조를 지키는 여인에 비유한 이름이다. 이밖에 여인과 관련한 수목명으로 여정목, 여복송, 각시괴불나무 등이 있다.
여인을 비유한 나무이름이 있다. 셈할 정도는 아니고 몇 개가 있다. 그것도 통용명(정명)은 '열녀수'와 '각시괴불나무' 정도에 불과하고 대부분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다. '각시고광나무'와 '각시석남'은 각각 '애기고광나무'와 '애기석남'으로도 부르며, ‘여복송’은 흔치 않은 이름이다. '미인송'은 별칭이고, '여정목'과 '천녀화'는 한자이름이다. 이들 나무는 이름만으로는 어떤 종류인지 잘 모른다. 그래서 이들 나무이름의 유래를 중심으로 그 뜻과 종류를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미인송은 곧게 뻗은 아름다운 소나무
이미 알려진 대로 한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소나무다. 생각했던 것보다 종류도 많고 이름도 많다. 유식하게 말하면 변종이나 품종이 많고, 이름과 별명도 많다는 얘기다. 별칭 중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미인송(美人松)’이 있다. 키가 커서 보기에 좋은 소나무를 일컫는 별칭이다. 글자 그대로는 아름다운 여인과 같은 소나무라고 해야 적격인 이름이다. 의미를 부여하고 풀이하면 얼굴미인을 비유한 것이라 볼 수는 없지만 쭉쭉 뻗은 미녀의 다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별칭인 것만은 어설프게나마 맞는 것 같다. 어디에 많은가 하면 백두산 자락이다. 백두산을 가본 사람이라면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는 소나무이며,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야만 하는 소나무다.
그런데 백두산의 미인송에 애처로운 사랑의 전설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터다. 설화는 송풍(松風)이란 청년과 나월(蘿月)이란 처녀가 주인공 인 이야기다. 미인송만을 생각하면 송풍보다 나월이란 처녀와 관계가 더 많다. 이 청년과 처녀의 이름을 합치면 '송풍라월(松風蘿月)'이다. 이 말은 원래 소나무의 가지 사이로 부는 바람과 덩굴숲 사이에서 비치는 달빛을 뜻하지만 대체로 선남선녀를 비유하는 것으로 써오고 있다.
설화의 미인송은 백두산 북쪽 안도현 북흥 이도백하 마을 어귀에 숲을 이룬 소나무다. 마을사람들은 미인송 숲을 전설 속 주인공 이름을 따서 송풍라월(松風蘿月)이라 부른다. 송풍과 나월은 어려서부터 한마을에서 건장한 청년과 마음씨 곱고 예쁜 처녀로 자라났다. 두 사람은 달빛이 백하강 물살을 곱게 비추던 어느 날 밤, 장차 부부가 되자는 언약을 맺었다. 그런데 마을 이장 구호가 나월을 애첩으로 두기 위해 송풍을 멀리 떠나보냈다. 이장은 빚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송풍에게 1년 동안 성 쌓는 부역을 떠맡겼던 것이다.
송풍이 떠나자 이장은 매파(중매꾼)를 나월에게 보내어 첩이 되도록 회유했다. 나월은 그때마다 거절하며 1년을 버텼다. 그러나 결혼을 약속한 송풍은 돌아오지 않았고 돌에 치여 죽었다는 소문만 들려왔다. 나월은 그 후 매파의 협박과 빚 독촉을 견디지 못하고 송풍과 언약했던 백하강 기슭으로 나가 강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나월의 주검은 강물이 모래와 흙을 실어와 무덤을 만들어 주었고, 무덤 위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다.
송풍은 살아 돌아왔으나 나월이 죽은 지 3년이 지난 뒤였다. 어느 날 밤, 슬픔을 억누르지 못한 송풍은 나월이 죽은 이유를 전해 듣고 이장의 집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나월의 묘지로 향했다. 무덤에 자라난 소나무를 나월의 화신이라 생각해 포옹하듯 끌어안은 채 붉은 피를 토하며 죽었다. 그 뒤 소나무는 쑥쑥 자랐고 가지마다 주렁주렁 솔방울이 맺혔고 씨들이 바람에 날려 사방으로 퍼졌다. 송풍이 죽을 때에 토한 피가 소나무 줄기에 묻어 미인송 줄기가 더욱 붉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이 전설 때문인지 백두산 자락의 소나무들은 유난히 붉은 줄기가 하늘 높이 뻗어 있다.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인의 다리처럼 아름답다는 비유가 맞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인식하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 미인송은 이렇게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미인송은 자연에 순응한 결과물이라 할 수는 없을까. 즉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의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곁가지의 생명을 포기하는 방법을 택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이름이 좋아서인지 하늘 높이 곧게 자란 소나무를 모두 미인송으로 부르고 있다. 예컨대 ‘금강송’이나 ‘춘양목’이라 부르는 곧은 소나무도 일명 미인송이라 별칭한다. 오늘날의 미인송은 백두산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금강산에도 자라고 영월, 봉화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한반도의 미인송은 중국과 일본의 것보다도 크고 아름답다. 따라서 소나무가 동아시아에만 자라는 나무이므로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크고 아름다운 소나무라 불러도 과언은 아니다.
여정목, 열녀수도 정절의 여인과 관련돼
미인송의 전설과 비슷한 내용의 설화에서 유래한 나무이름 중에 '여정목(女貞木) 또는 여정자(女貞子)'라는 것도 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정절을 지키는 여자 같은 나무 또는 그 종자(씨)'라는 뜻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 이름은 주로 한자이름으로 쓰거나 한방에서 널리 부르는 이름이며, 일반적으로는 물푸레나무과에 속한 '광나무'를 말한다. 여정목(여정자)은 사시사철 변함없이 푸른 잎을 가지는 소나무의 특징을 여자의 정절에 비유한 것 같다.
이 이름의 유래도 슬픈 전설이 있다. 정자(貞子)라는 이름을 가진 아가씨가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전쟁터로 나가게 됐다. 남편이 전사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듣고 정자는 쓰러져 앓다가 죽었다. 그녀는 유언으로 무덤 앞에 늘푸른나무 한 그루를 심어달라고 했다. 마침내 부상을 입은 채 천신만고 끝에 전쟁터에서 돌아온 남편은 무덤의 늘푸른나무를 잡고 며칠을 울었다. 이상하게도 그 나무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 남편은 정자의 혼이라 생각하고 열매를 따먹었지만 처녀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아픈 몸이 급속히 회복됐고, 이 소문이 전해지면서 약으로 사용됐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나무의 열매를 여정실, 그 씨를 여정자라고 했다. 참고로 이와 비슷한 나무로서 잎이 떨어지는 '쥐똥나무'를 '남정실 또는 남정자'라고 한다.
여인과 관련된 나무이름으로는 '열녀목(烈女木)'도 있다. 열녀수(烈女樹)라고도 부르는 나무이다. 오얏나무(자두나무)와 거의 비슷한 나무로서 줄기와 가지가 옆으로 퍼지지 않고 하늘 높이 곧게 자라는 특징이 있다. 이 이름은 한 남자만 죽도록 사랑하고 죽기까지 그만을 위해 살아야 하는 여인을 칭송하기 위해 비유됐는데, 곧게 자라는 특징을 절개를 꺾지 않거나 정조를 지키는 여인처럼 여겼던 것이다. 이 열녀수로 소박을 막는다는 무속이 있다. 소박은 부부 사이에 불화가 생겨서 여자가 쫓겨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부부 사이의 애정을 방해하는 마귀가 있기 때문이라 하여 이 마귀를 퇴치해야 부부 사이의 금실이 좋아지는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 마귀를 퇴치하는 방법의 하나로 열녀수로 도끼나 칼 등의 흉기 모형을 만들어 여자가 남몰래 늘 치마 속에 차고 다녔단다.
이밖에 선녀, 어린 여자를 비유하기도
깊은 산 속에서 은은한 향기와 함께 흰빛의 큰 꽃을 피우는 '함박꽃나무'를 한자로 '천녀화(天女花)'라 쓴다. 여기에서의 천녀(天女)는 직녀성의 이름 또는 선녀를 뜻한다. 흔히 '천녀산화(天女散花)'라고 하면 하늘에서 선녀가 뿌리는 꽃을 말한다. 따라서 천녀화는 선녀의 꽃을 의미한다. 흰빛은 정적이고 안정감을 주기 때문에 욕심 없는 절제 속에서 평화롭고 순박하게 살아가려는 한민족의 심성을 잘 반영한다. 우리 조상들이 요염한 꽃보다 소박하면서도 은은한 향기를 지닌 꽃을 더욱 가까이 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한민족은 소박한 흰빛의 옷을 입었던 '백의민족(白衣民族)'이 아니었던가.
이밖에도 여인을 비유한 나무이름이 더러 있다. 나무이름에 '각시'를 접두어로 사용하는 이름이 있는데, 각시괴불나무, 각시고광나무(애기고광나무), 각시석남(애기석남) 등이다. 각시의 접두어가 붙은 나무이름은 크기가 작음을 비유할 때에 썼다. 즉 새색시나 어린 여자를 뜻하는 각시를 작은 형질의 특징을 가진 나무에 비유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풀의 성질이 있는 덩굴나무로서 '할미밀망(할미밀빵)'은 그 열매와 줄기의 성질을 백발의 할머니와 연약한 줄기를 비유해 이름이 붙었다. 한편 앞서 설명한 소나무 종류의 하나로서 '여복송(女福松)'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이름이 있다. 여복송은 열매가 가지의 끝부분에 여러 개가 모여 달리는 소나무다. 이름의 유래는 확실히 알 길이 없다. 다만 여복(女福)은 국어사전 풀이로서 아름다운 여자가 잘 따르는 복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여복송은 여자복이 있는 소나무라는 뜻인데 그 의미가 불분명하다. 그런데 이와 대조적인 나무이름으로서 '남복송(男福松)'도 있다. 이는 열매가 가지의 밑부분에 많이 모여 달리는 소나무다. 이래저래 이 이름의 유래는 필자의 현재 식견으론 불분명하다. 이에 대해서는 파악되는 대로 알려드려야 할 책임이 따르지만 혹시 이 뜻의 유래를 알고 있는 독자가 계신다면 필자에게 전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 송홍선 민속식물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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