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기는 산림청/꽃과 나무

버들과 연꽃을 노래한 명기 부용

대한민국 산림청 2009. 10. 16. 16:15

연꽃의 별칭과 같은 이름의 명기 부용(芙蓉). 연꽃보다 더 아름다운 자기만족의 의식을 곧잘 나타낸 부용은 버드나무가 심어진 물가 근처에 살면서 버들과 벗해 이별의 슬픔을 달랬다. 그녀는「부용상사곡」이라는 애틋한 층시로 유명한 재녀였다.

 

어설픈 문답으로 시작한다. '부용(芙蓉)'하면 제일 먼저 무엇을 생각하는가. 아름다운 꽃 '조선시대 명기(名妓)' 대답은 쉽다.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꽃나무를 먼저 떠올릴 것이고, 문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기녀(妓女)를 우선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필자는 물론 아름다운 꽃나무를 가장 먼저 생각한다. 관심분야가 풀꽃나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궁화의 꽃과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서 '부용'이라는 식물이름을 가진 커다랗고 화려한 빛깔의 꽃나무다. 그런데 연못에 자라는 '연꽃'을 흔히 부용이라 별칭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연꽃을 한명으로 부용이라 썼다.

 

본 글에서는 아름다운 꽃의 부용과 이름이 같은 기생의 삶을 꽃나무의 인식에서 찾아볼까 한다. 그래서 서재의 구석에 박힌 정비석(鄭飛石, 1911~1991)의 소설『명기열전』을 꺼내 전10권 중 제1권 제1화로 전개한 '성천기 부용'을 모두 읽었다.

 

연꽃과 버들처럼 아름다운 기녀


지금으로부터 160여 년 전에 뭇 사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기녀가 있었다. 송도의 황진이(黃眞伊)와 부안의 이매창(李梅窓)과 함께 조선시대를 통틀어 시 잘 짓고 노래 잘 부르는 3대 명기의 한 사람. 기생 김부용(金芙蓉)이다. 그녀를 여류시인으로 부를 때는 흔히 운초(雲楚)라는 호로 이름한다. 평안도 성천(成川) 출생이지만 출생년도는 불분명하다. 1812년부터 1851년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부용은 연꽃의 별칭이자 자신의 기생이름이다.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연꽃에 비유한 시를 곧잘 읊었다. 그녀의 「희제(戱題)」라는 시가 그것이다.

 

연꽃 활짝 피어 연못 가득 붉으니
사람들은 연꽃이 나보다 곱다지만
아침나절 이 몸이 둑길을 거닐 때에
어찌하여 연꽃 안보고 나만 보는가.

 

이 시에서 부용은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보다 연꽃이 더욱 아름답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연꽃을 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재치있게 반문한다. 즉 자신의 자화상을 연꽃같이 사뿐사뿐 걷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사람들이 연꽃보다는 자신을 보는 것으로 표현해 연꽃보다 더 아름다운 자기만족의 의식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이는 「부용당(芙蓉當)」이라는 시에서도 잘 묘사하고 있다.

 

연꽃 연잎은 붉은 난간 뒤엎고
단청고운 정자에 놀이 배 떠있네.
-중략-
운모병풍 펴져있는 은촛대 아래에서
미인이 사뿐사뿐 연꽃인양 나타나네.

 

김부용(金芙蓉)은 평남 성천군 삼덕면 대동리 현봉고을에서 무산(巫山) 12봉의 정기를 받고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4살 때에 글을 배우기 시작해 10살 때에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게 됐다. 12살에 기적에 오르고, 15살엔 시문과 노래와 춤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얼굴마저 고와 명기가 됐다. 그리고 16살 땐 백일장에서 장원한다. '운초'란 호는 무산 12봉이 초나라 무산에 있는 12봉과 같이 아름답다고 하여 초나라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란다. 부용은 기생이 된 후 사신들이 묵던 객사에서 생활했음을 말해주는 시가 있으며, 누각에 올라 자연을 읊조리기까지 했다.

 

양지바른 언덕에 안개 멀리 보이는 집
버드나무 사립문이 바로 내가 사는 집
밤비에 두 시내는 석자 깊이 물이요
숲 이어진 십리는 거의가 꽃이라네.
발 걷고 일어나면 봄철 해는 높이 솟고
줄 이은 수양버들 양쪽언덕은 소나무네.
들판으로 뻗은 산은 말 달리는 형세 같고
하늘에 널린 구름 용이 노는 기세 같네.

 

위의「들에서 살며」라는 시에 나타난 것처럼 부용은 버드나무가 있는 곳에서 생활했으며, 버드나무가 있다는 것은 물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물이 있는 곳이기에 자신의 이름과 같은 연꽃(부용)도 만발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버드나무는 예로부터 '여인'을 상징하는 나무이므로 연꽃과 함께 자신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집 주변의 형세는 굳은 절개를 표상하는 소나무가 어우러진 곳임을 알 수 있다.

 

무산 십이봉 단풍잎은 남은 가을에 애잔하고
술잔 드니 바람은 열 두 봉우리를 스쳐간다.
만 가지 수심은 모두 눈처럼 피어나는데
물처럼 푸른 하늘에 구름만 떠 있네.

 

부용은 비록 기생의 생활을 하면서도「강선루에 올라」라는 시에서 보듯이 시와 노래와 풍류를 맘껏 즐겼던 것으로 여겨진다. 적어도 남편이었던 연천(淵泉) 김이양(金履陽, 1755∼1845)과 이별의 아픔을 겪기 전까지는….

 

버들 창가에서 이별의 슬픔 되새겨


부용은 19살 때에 성천의 사또(유관준)가 평양감사 김이양에게 인사차 소개하면서 일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김이양은 시문에 능했으며 예조판서를 거쳐 평안감사로 부임한 명관이었다. 그때 김이양의 나이는 77살이었다. 19살의 꽃다운 여인과 인생의 황혼기를 넘긴 노객이 서로 눈이 맞았던 것이다.

 

사랑은 절대로 객관적일 수는 없는 것인가. 부용은 김이양과의 만남에 대해 스스로의 인생을 선택하는 절대 절명의 기회로서 타인이 관여할 몫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기가 막힌 사랑이 펼쳐지지만 김이양이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가야 할 때에 서로 이별의 기로에 섰다. 그때 김이양은 부용을 기적(妓籍)에서 빼내고 부실(副室)로 삼았다. 그리고는 곧 부르겠다는 약속만 남기고 떠나갔다. 그러나 곧 부르겠다던 약속은 해를 넘겼으나 소식이 없었다. 부용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애절한 시를 써서 인편으로 보냈다. 이 시가 부용이 남긴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부용상사곡(芙蓉想思曲)」이라는 보탑시(寶塔詩)이다. 일자이구(一字二句)로 시작해 십팔자이구(十八字二句)로 끝나는 장편의 층시(層詩)이다.

 

만남과 이별은 하늘이 만드는 운명이기에 인간의 의지로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생이 유한한 인간으로써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하다. 이별이란 누구에게나 눈물겹고 슬픈 것이다. 부용은 이별을 한 후 재회의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외롭고도 그리운 나날을 보냈다. 실버들 등을 소재로 한 연모의 시를 쓰는 일은 계속됐다.

 

실버들 휘늘어진 창에 기대서니
님 없는 집에는 이끼만 낀다.
주렴밖엔 봄바람이 절로 불어와
님 오시나 속은 게 그 몇 번인가.

 

부용의 눈같이 흰 살결과 꽃같이 곱던 얼굴도 기다림의 고통과 상심 때문에 점점 일그러져 갔다. 이는 부용의 시 중에 '봄은 가고 꽃이 지니 야위는 얼굴/ 다시금 다듬어도 꽃답지 않네./ 못 잊어 이 상사 못 버린다 해도/ 만났던 옛 정보다 그리는 정이 더 좋아'에서 알 수 있다. 세월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늙어야만 하는 것이 인생이고, 아름다움도 영원한 소유가 아님을 꽃으로 비유한 표현이 아름답다.

 

초당마마 별칭, 풀꽃과도 인연 있어


김이양은 후에 부용을 한양으로 불러 기와집을 새로 짓고 후원에 '녹천당(祿泉堂)'이라는 정자를 꾸며 초당(草堂)이라 불렀다. 부용은 이곳에서 '초당마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김이양과 살림을 하게 된다. 김이양은 1845년 5월에 91살의 천수로 부용이 지켜보는 앞에서 세상을 하직하고 천안 광덕사 인근의 태화산에 묻힌다. 김이양의 사후에 부용은 처지가 비슷한 운초, 금원, 경산, 죽서, 경춘 등 시재가 있는 여성들과 서로 모여 시를 주고받으며 지내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죽으면 김이양 묘소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단다. 이 유언을 근거로 소설가 정비석 등이 부용의 묘소를 찾아 나서면서 천안 광덕사 옆으로 200m쯤 산을 향해 들어간 곳에 김부용(金芙蓉)의 시비를 세우게 됐으며 거기에서 800m쯤 올라간 곳에 부용의 무덤이라고 전하는 곳을 찾게 됐다.

 

조선시대에는 여류시인으로 이름난 기생이 많았으나 시집을 남긴 기생은 그리 흔치 않다. 황진이도 몇 편의 시조와 한시뿐이고, 이매창의 시도 몇 수 남아 있지 않으나 교과서에 실려 있어서 잘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부용의 작품집인『운초집』에 실려 있는 시는 규수문학의 정수로 꼽힌다. 그녀의 작품으로는「억가형(憶家兄)」,「오강루소집(五江樓小集)」등이 있고, 시문집으로는 일명 부용집(芙蓉集)이라는『운초당시고』가 있다. 한시만도 300여 수가 전한다. 그녀는 다재다능한 한민족의 한 여인이었다.

 

< 송홍선 민속식물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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