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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소설「화사」에 등장하는 꽃나무 여인

대한민국 산림청 2009. 10. 16. 16:17

조선 중기의 소설 '화사'는 풀꽃나무를 인격화시켜 왕국의 흥망을 그린 작품이다. 왕비는 계화, 매화, 버들 등으로 의인화했으며, 매화는 도나라, 모란은 하나라, 연꽃은 당나라의 왕으로서 왕국을 통치한다. 그러나 이들 나라는 부정한 인재 등용, 미인과의 사치스런 행동, 숭불정책 고집 등으로 모두 망하고 만다.

 

우리의 고전소설 중에는 풀꽃나무를 의인화(擬人化)한 작품이 있다. 설총의 '화왕계'를 비롯해 이이순의 '화왕전' 등이 그것이다. 이 소설들은 풀꽃나무를 인격화시켜 풀꽃나무 왕국의 흥망을 그린 작품이다. 특히 조선 중기의 임제(林悌)가 쓴 '화사(花史)'는 의인화한 풀꽃나무 왕국의 절정을 이룬 한문소설이다. 화사는 사계절에 피는 풀꽃나무 중에서 겨울과 초봄의 매화, 봄과 초여름의 모란, 여름과 초가을의 연꽃(백련꽃)을 왕으로 인격화했으며 그밖에도 여러 풀꽃나무를 등장시켰다. 풀꽃나무의 세계를 나라와 백성과 신하로 삼아서 사건을 진행시킨 것이다. 특이하게도 이 소설은 중요 내용마다 작가 자신의 사설을 달아놓아 당시 현실사회의 부정을 비유하고 풍자함으로써 희망하는 이상사회의 의식을 반영했다. 화사는 모두 8왕국을 내세웠는데, 그 중 제법 큰 왕국은 도(陶)나라, 하(夏)나라, 당(唐)나라이다. 매화는 도나라의 왕, 모란은 하나라의 왕, 연꽃은 당나라의 왕으로서 각각의 왕국을 통치했다.

 

본 글에서는 '화사'의 내용 중 풀꽃나무 왕국의 흥망에서 인격화한 풀꽃나무의 여인에 초점을 맞춰 보았다. 그러다 보니 왕국의 흥망이 여인과 관련이 많음을 알게 됐다. 그렇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왜냐하면 본 글은 뜻하지 않게 나쁜 이미지의 여인상을 강조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필자의 생각은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바라 본 것이지 오늘날의 여인상을 반영한 것이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도나라 왕이 미인계에 빠져 쇠퇴 자초


도나라는 열왕(烈王, 매화)이 왕명이다. 열왕의 어머니 도화(복숭아나무의 꽃)는 왕모가 복숭아나무의 열매를 받아먹는 꿈을 꾸고 나서 임신하여 영왕을 낳았다. 이때에 이상한 향기가 풍기고 그 향기는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태어난 매화가 후에 도나라를 세웠다. 열왕은 왕위에 오른 지 2년만에 왕비를 맞았는데, 그 왕비는 덕이 높고 근면한 계화(계수, 생강나무, 목서 등 향기를 풍기는 나무의 꽃)이다. 여기에서 저자인 임제는 '집과 나라의 흥망은 부부간에 비롯된다. 열왕은 훌륭한 어머니가 있고 계화의 왕비를 얻었으므로 나라의 발전은 당연한 일이다'라는 사설을 달았다. 열왕은 총명한 왕비의 내조를 받으면서 충신을 잘 써서 선정을 펼 수 있었다. 눈(雪)이 난을 일으키자 소나무, 잣나무, 대나무 등이 난을 진압하기도 했다. 그러나 열왕이 나라를 세운지 6년만에 바람을 맞아 죽음으로써 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왕비 계화가 잔병이 많아 아들을 낳지 못하자 열왕의 셋째 동생인 양주공(楊州公)이 영왕(英王)으로 추대돼 동도(東陶)나라를 세움으로써 그 후 5년 동안 도나라가 이어진다.

 

영왕은 신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화를 왕비로 맞아들이면서 미인계에 빠져 들었다. 왕비 매화는 어느 날 얼굴이 예쁜 도요요(桃夭夭, 복숭아나무)가 궁녀로 들어오자 혹시 영왕으로부터 사랑을 잃을까봐 걱정을 많이 하는 바람에 그것이 그만 병을 자초하고 말았다. 그러자 영왕은 도요요를 죽이고 왕비 매화를 안심시키는 듯했다. 그런데 영왕은 절세가인(絶世佳人)으로 아름다운 자태뿐만 아니라 춤도 잘 추는 양귀화(楊貴花, 버드나무의 꽃)가 나타나면서 매화에 대한 사랑이 식게 됐다. 이렇게 되자 매화는 병이 더욱 악화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영왕은 양귀화를 왕비로 삼았다. 영왕은 양귀화를 사랑하면서 사치와 향락에 빠졌고 미인의 말에 매혹돼 나라 정치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양귀화가 얼굴이 오염하고 왕을 영합하여 그녀의 친척을 고관으로 삼고 권세를 부리니 조정이 어지러워졌다. 변방의 오랑캐(벌)를 필두로 지방의 버드나무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해마다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영왕은 무장군인의 비바람에 쫓겨 달아나다가 죽었고, 왕비 양귀화는 성문을 다서다가 진흙 속에 빠져 죽었다. 이와 같이 영왕은 간신을 등용하고 정치를 돌보지 않은 채 향락만 일삼다가 도나라는 건국한 지 11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저자는 '이상하게도 영왕이 매화를 버리고 양귀화를 사랑한 것 등이 마치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를 사랑하면서 나라의 정치를 돌보지 않은 때와 똑 같았다. 즉 양귀비의 친척인 양국충(楊國忠)이 뇌물 인사의 중용과 독점, 그리고 안록산의 난리 등이다'라는 사설을 달았다. 그리고 임제는 이런 역사의 내력을 후세 사람이 그대로 모방하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사설을 쓴다고 적었다. 물론 현재는 이런 내력이 없겠지만 시사하는 바는 있다.

 

숭불정책은 왕국의 발전에 도움 안 돼


다음은 도나라가 망한 후 세워진 하나라이다. 왕명은 문왕(文王, 모란)이다. 문왕은 모란을 승상으로 삼고 문학에 능한 신하들에게 국사를 맡겼다. 그랬더니 조신들이 청렴하고 문물이 뛰어나 천하가 태평했다. 그러나 문왕이 권귀(바람)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자 어진 신하들이 풍백(風佰)과 소녀의 간사함을 경계해야 한다고 간청했다. 그러나 문왕은 그런 간청을 듣지 않았다. 결국 풍백은 권세를 부리기 시작했고, 문왕은 향락만 일삼으니 국정이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태평을 틈타 동도(東陶)나라 때에 일어났던 무릉(武陵)의 도화가 홍백(紅白)으로 갈라져 싸웠던 당쟁이 재발했다. 게다가 녹림적(綠林賊, 나뭇잎)이 난을 일으켜 천하가 이에 호응하면서 당파를 형성했던 관료들은 투항하고 말았다. 그리고 문왕은 후원에서 놀다가 생각지도 않은 야록(野鹿, 산야의 사슴)에게 물렸다. 간악한 소녀는 이때라 생각하고 사슴에 물려 신음하는 왕에게 독약을 올렸다. 문왕은 그것을 마시고 재위기간 6년만에 죽고 말았다.

 

여기에서도 저자는 '미인이 사람을 해친다. 그것이 왕국에 있으면 나라가 망하고, 이 때문에 사치하고 방종한 마음이 생기며, 태만하고 안락의 습성이 일어나 아첨을 좋아하고, 곧고 바른 것을 미워하는 마음이 커지며, 재물을 탐내고 인민을 박대하는 정치가 생겨난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두렵지 않으며 또한 어찌 삼갈 바가 아닌가'라는 사설을 적었다.

 

하나라가 망한 후에 세워진 나라는 당나라이다. 백지(白芷, 구릿대의 뿌리) 등이 수중군자(水中君子) 백련꽃을 명왕(明王)이라 하여 받들었다. 명왕은 수국(물의 나라)이 번성하고 태평한 정치를 펼쳐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명왕은 도인의 말을 듣고 국방을 소홀히 함과 아울러 불교만 굳게 믿으면서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풍백은 금나라 왕이 돼 녹림적을 이끌고 당나라를 공격했다. 명왕은 농림적의 포위 공격에 무참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명왕은 방사(方士)의 말을 듣고 장생불사한다는 백로(白露)를 마셨다가 오히려 병을 얻고 말았다. 또한 신하들도 모두 이 이슬을 마셔 벙어리가 됐다. 명왕이 분을 참지 못해 '하하(荷荷, 연꽃이여! 연꽃이여!)'라는 이름을 부르면서 죽음으로써 당나라는 건국한지 5년만에 망하고 말았다.

 

즉 명왕은 문장가 문조의 유교정책에 대한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숭불정책을 쓰다가 나라를 어지럽게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명왕은 아첨 잘하는 신하를 좋아했다. 어느 날 명왕은 첩으로 두고 있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육랑'이라 하여 연꽃에 비유한 적이 있다. 그때 아첨 잘하는 신하가 "신은 연꽃과 육랑을 똑같이 여긴다"고 극찬하자 명왕은 그 신하를 좋아했다. 이에 대해 저자인 임제는 '아첨은 단맛이 있는 풀을 씹는 것보다도 더 달고 나무를 칭찬하는 것보다도 더하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사설을 달았다.

 

풀꽃나무의 자연섭리처럼 국정 이끌어야


이 소설을 쓴 임제는 이러한 역대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지켜본 후 종합적이고 결론적인 사설을 적었다. 요약해 본다. 3나라 4왕조의 흥망은 눈 깜박할 사이였다. 어찌 보면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다. 남가일몽 같은 흥망성쇠를 생각하면 이 붓끝이 공연스레 떨리는 것 같고 정말 슬프고도 또 슬플 뿐이다. 또한 인간이 꽃나무만큼 성실하고 정직할 수 있을 것인가. 꽃나무만큼 믿을 수 있고 절개가 굳을 수 있을 것인가. 춘하추동 사계절을 정확하게 알려 주는 꽃나무만큼 인간에게 신의가 있을 것인가. 그리고 꽃나무는 어디서고 자라고 핀다. 자리를 다투지 않는다. 좋은 땅이나 나쁜 땅이나 자갈밭이나 바위틈이라도 뿌리가 뻗을 만한 곳은 어디든 마다 않고 자라나 꽃이 핀다. 높고 낮은 것과 귀하고 천한 것을 가리지 않는다. 인간에게 이토록 공평하고 관대하고 자기희생의 정신이 있을 것인가. 꽃나무처럼 공평무사한 마음이 있을 것인가. 꽃나무는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하고 착하고 아름답고 공평하다. 아름다운 꽃나무는 욕망이 없다. 풀꽃나무는 인간사로 보면 가장 자랑스럽고 빛나는 군자와 같다. 군자는 인간의 꽃이다.

 

이 소설은 작가의 사설에서 보듯이 당시 역대왕정의 잘잘못과 함께 신하들의 충분과 불충분 등이 미치는 응보관계를 비유적으로 형상화했다. 또한 글머리에서도 밝혔듯이 당시 현실사회의 부정을 풍자하고 이상사회를 희망하는 저자 자신의 의식을 반영했다. 예컨대 숭불정책을 쓰다가 나라가 망하게 되는 내용은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비유적 풍자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라의 흥망과 여인의 관련성은 중국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 사랑의 시대상황을 소설로서 표현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은 또한 외적으로 부귀영화와 권력을 가진 왕은 내적으로 덕을 잃거나 호색으로 인해 정치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왕도정치의 구현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송홍선 민속식물연구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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