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나그네
북방의 차디찬 풍파를 한성이 떠 받쳐주고
북악의 당당함을 이어가는 곳.
천년의 숲으로 신비로움을 간직한 채
사랑하는 우리들의 님은 떠나갔지만
바람과 나무와 별들은
오늘도 살포시 스치고 있습니다.
수연산방에서 청춘의 순수함을 그린 9인회
역사의 뒤안길을 되새긴 혜곡 선생
오늘도 가녀린 승무를 신명나게 추는 지타 선생
성북 북정골 산사에서 조국 독립을 꿈꾸는 만해 선생
청춘시인의 자유로운 영혼은
성북동 비둘기가 되어 험난한 삼각산을 넘나들며
오늘도 허공을 맴돌고 있습니다.
북악숲 사이로 스치는 바람 따라
이끼 낀 성벽 위로 비치는 달빛 따라
돌아 돌아 쉬어 가는 나그네.
200미터를 걸어가면 혜곡 최순우 선생님의 옛집이 나온다. 큰길에서 잠깐 비껴든 골목에 자리하고 있는데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소박하고 운치 있는 대청이 아름다운 집이다. 혜곡 선생님은 우리의 것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평생을 문화재를 찾아내고 보존하는 일에 앞장섰다. 또한 뛰어난 안목으로 우리 문화재를 널리 알린 분이다. 지금은 시민문화유산 1호로써 시민모금으로 매입하여 보수한 후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서 찻길을 건너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청록파 시인 지타 조지훈 선생님의 집터가 있다. 지타 선생님이 30여년 동안 살았던 옛집은 헐리고 지금은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다. 나빌레라 흐드러지게 춤추는 시인의 꿈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조지훈 집터 골목길에서 가던 길로 조금 더 가면 선잠단 터다. 선잠단은 양잠의 풍요를 위해 처음르로 백성에게 양잠하는 법을 가르친 신에게 제사 지내는 곳이다. 조선시대 왕은 선농단에서 노을 갈고,농사의 신인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제를 올렸고,왕비는 선잠단에서 누에를 치고 잠신 서릉씨에게 제사 지냈다. 1963년에 사적 제83호로 지정되어 해마다 5월초에 선잠제를 지내고 왕비행렬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선잠단터 앞 삼거리에서 선잠단터를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가면 길이 두갈래로 갈린다. 오른쪽 주한 대사관저 길로 200미터 정도 가면 느티나무 뒤로 성락원 입구가 보인다. 성락원은 조선 순조 때 조성된 민가 정원이다. 철종 때는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의친왕의 별궁으로 35년 사용되었다가 1932년 아들 이건에게 상속되었다. 이건 공이 1947년 일본에 귀화한 후 박용하라는 인물이 소유하였다가 심상응의 후손인 심상준이 매입하였다. 1992년 사적 제378호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 제35호 지정 변경되어 보존되고 있다. 성락원은 서울에 남아 있는 민간의 원림으로써 거의 유일한 것이다. 울창한 묵은 나무들과 인공으로 조성된 용두가산이 어울린 모습이 그림 같은 곳이다. 자연 암반과 계곡이 아름다운 성북동 풍경을 집안으로 끌어들인 이곳은 폭포,연못,우거진 나무와 한옥이 어우러져 조선특유의 정원을 이루고 있다. 성북동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모인 영벽지 부근의 바위에는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한 글귀가 새겨져 있다.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에 비치고 맑은 샘물은 돌 위에 흐르며 푸른 산이 몇 겹 싸여 나는 내 농막을 사랑한다.‘ 성락원 주변에는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10개국 이상의 주한대사관저가 자리잡고 있다.
천주교 성북동 성당을 지나면 갈림길인데 길 앞에 길상사와 육화사 표지판이 있다. 왼쪽으로 가던길로 쭉 올라가면 길상사가 있다. 일제 강점기 기업가인 친일파 백인기는 성북동에 별장을 몇 채 가지고 있었다.
그중 한 채가 이곳이다. 후원의 산림만 10여만평에 달하였고, 별장 입구에 화강석으로 산문을 쌓았다. 후원에는 수백년 묵은 노송이 우거졌고 맑은 물 위에는 돌다리가 놓였다. 해방후 ‘청암장’ 이라는 고급요정으로 운영되다가 1951년 김영한이 당시로는 큰돈인 650만원에 인수하여 다시 ‘대원각’이라는 요릿집을 열었다.
시인 백석이 사랑한 여인으로도 유명한 김영한은 전통 기생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로 사업가로 수완을 발휘하였다. 대원각은 각 정당의 회의 장소이자 밀실정치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유명했다. 고급요정으로 명성을 떨쳤던 대원각은 1996년 법정스님에게 기증되었다.‘길상사’(7천평)는 법정스님이 지어준 김영한의 법명 吉祥華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265년된 오래된 느티나무가 옛적 조선시대 숲의 아름다운 자취를 남기고 있다.
길상사 일주문 앞에서 삼청터널 방향으로 가면 주한외교사절 산택앞에 각국의 국기가 펄럭이는 우정공원이 있다. 골목길 계단을 100미터 올라가면 구릉 오른쪽에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심우장이 북악을 바라보고 있다. 심우장은 1933년에 지은 자그마한 집이다. 평생 독립운동을 하시고 백담사에서 수행하시다가 수풀과 늑대까지 있었던 외진 이곳에 자리 잡으셨다. 일제강점기 총독부가 있는 남쪽이 보기 싫어 북향으로 집을 세우고,일제에 돌아선 변절한 지식인들은 문 안에 들이지 않았다. ‘심우장’은 불교의 禪 수행에서 처음 마음을 일으키는 단계에서 나온 말로, ‘無常大道를 깨우치려 공부하는 집‘ 이라는 뜻이다. 만해는 해방을 보지 못한채 1944년 심우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심우장은 1985년 서울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어, 만해를 기리는 많은 사람들이 찾는 성북동의 명소가 되었다. 만해는 떠났지만 그가 마당에서 직접 심은 향나무가 주인을 닮은 기개와 푸르름으로 심우장을 지키고 있다.
[ 님은 갔습니다. 아아-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님의 침묵. 한용운 ]
큰길에서 200미터 정도 내려가면 왼쪽에 성북구립미술관 옆에 전통 찻집이 있는데,이곳이 상허 이태준 선생의 옛집이다. 우리나라 현대 순수소설의 바탕을 이룬 이태준 선생이 1933년 집을 짓고, 1946년 북한으로 가기 전까지 살던 집이다. 14년간 머물며, 이곳에서 이효석,정지용,이상,유치진,김유정,이무영,김기림,박태원(구보씨의 1일),이태준 등과 9인회를 결성하여 고담준론을 나누며한국 근대 순수문학의 초석을 만들고 이끌었다. 이곳에서 ‘달밤’ ‘가마귀’ ‘복덕방’ 같은 작품을 썼다. ‘수연산방(壽硏山房)’이란 이름을 짓고 살며 느낀 소소한 행복과 이야기를 수필로 남겼다. 조선시대 건축의 순박함을 닮은 안채는 우직함과 상허의 안목이 깃들어 있다. 지금은 유족들이 전통 찻집을 운영하며 개방하고 있다.
아랫길로 옛 성곽터를 따라 250미터 내려가면 성북초등학교 왼쪽에 간송미술관이 있다. 간송 전형필은 일제강점기 훼손되고 빼앗기는 문화유산을 보호한 문화재 수집가이다. 일본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대항하고, 우리 문화재의 가치를 알리려 노력하였다. 1936년 최초의 미술관인 보호각을 건립하였다. 수집한 문화재를 많은 사람들이 보고, 여러 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게 하라는 간송의 뜻을 이어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가 개설되었다.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1971년부터 지금까지 봄과 가을에 전시를 열어 소중한 문화유산을 공개하고 있다.
한성 북쪽 북악산 자락의 깊은 계곡과 신비로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 휘엉청 달밤에 별을 노래하는 시인들의 노래.바람과 노래소리는 한송이 노란꽃 나비가 되어 앳된 나그네를 설레이게 한다.
이끼낀 성터에 둥지를 튼 길잃은 성북동의 비둘기는 오늘도 쓸쓸히 도시를 헤매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