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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에 살어리랏다! 귀산촌 이야기> 도시생활에 지쳐 무작정 귀촌 후 교육자로! ①

대한민국 산림청 2017. 8. 25. 09:30

<산촌에 살어리랏다! 귀산촌 이야기>

도시생활에 지쳐 무작정 귀촌

교육자로! ①

- 윤요왕





 윤요왕씨는 시민단체 활동가였다. 서울의 천주교인권위원회와 원주의 정의평화위원회가 그의 주 활동무대였다. 시민단체의 활동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시대상황에 따라 동분서주하는 삶에 공허함을 느꼈다. 사회의 변화와 관계없이 독립된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대학 때 농촌활동을 왔던 춘천시 사북면에 마침 아는 선배가 먼저 귀촌해 있었다. 그의 도움을 받아 무작정 귀촌했다. 일 년간 머슴밥을 먹으며 산촌에서의 삶의 가능성을 봤다. 그리고 가족이 합류했다. 그렇게 시작된 산촌생활은 농업에서 교육으로 영역이 변하면서 이제는 산촌교육활동가가 되었다. 그의 부인은 여전히 교사 생활을 하며 그의 삶을 응원하고 있다. 2005년 마을의 한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교를 마치면 갈 데 없는 아이들, 방치된 아이들의 문제는 어른들의 책임이라는 각성이 일었다. 겨울방학을 활용한 계절학교를 시작으로 2007년에 방과후 공부방이 문을 열었다. 폐교 위기의 학교를 살리는 것이 마을의 붕괴를 막는 길이라 생각하여 지역 특성에 맞는 ‘산촌유학센터’를 설립했다. 처음은 방학 때 도시아이들을 초청하여 지역의 아이들과 함께하는 캠프로 시작했다. 2010년 봄부터 도시 학생들이 유학 와서 산촌의 일상을 함께하며 공부하고 있다. 처음 4명을 시작으로 2016년에는 24명, 현재 송화초등학교 학생은 50명이 넘는다. 그중 원래부터 마을에 살던 아이들은 10여 명에 불과하다.







 혼자만의 독립된 삶을 꿈꾸며


지금은 춘천별빛산골교육센터의 대표를 맡아 교육자의 길을 가고 있는 윤요왕씨는 사실 교육과는 관계없는 삶을 살았다. 그저 살다보니 이렇게 되어 있었다고나 할까. 그가 도시를 떠나 산촌으로 들어온 것은 2003년. 귀농귀촌이 본격화된 시기도 아니고, 사회적 흐름으로 자리잡기 전이다 보니 뚜렷한 목표를 세운 것도 아니다. 그저 도시에서의 삶이 공허했고, 막연히 꿈꾸었던 시골에서의 삶이 어떨까하는 동경만으로 무작정 귀·산촌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과 원주 등지에서 시민단체에서 인권운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서울의 천주교인권위원회, 원주의 정의평화위원회다. 시민단체의 일이라는 것이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회적 이슈가 변할 때마다 성명서를 내고 집회를 하거나 인권교육을 하는 일이 중심이라 시도 때도 없이 동분서주하는 나날들이었다. 보람도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자위하면서 지냈지만 마음 한 편이 공허했다. 사회의 변화나 사건사고와 관계없이 좀 더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나만의 소박한 삶을 꾸리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기대거나 사회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혼자만의 독립된 삶을 꿈꾸었다. 그 때 농촌활동을 왔던 지금의 마을이 떠올랐다. 마침 마을에 귀농한 선배가 있었다. 그를 찾아갔다. 1년만, 딱 1년만 살아볼 생각이었다. 그의 나이 33살 때였다.


선배집에서 함께 기거하며 농사일을 도와주면서 밥을 얻어먹었다. 머슴으로 산다 생각했다. 농·산촌의 현실이나 문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하나하나 손으로 배우고 발로 익혔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나니 계속해나갈 수 있겠다 싶었다. 무엇보다 도시로 돌아가기가 싫었다. 시간에 쫓기며 사는 소모적인 도시의 삶이 싫었다. 아직 젊으니까 새로 시작한 삶이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다행히 아내의 반대도 심하지 않았다. 원주에 있던 전세금을 빼서 집을 짓고 조그맣게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땅도 구입했다. 창업농후계자가 되어 약간의 융자도 받았다. 집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직접 지었다. 누구하나 집을 지어본 경험도 없었지만 직접 설계하고 자재를 구입해서 하나씩 하나씩 쌓아 올려갔다. 집짓는 틈틈이 밭에는 고구마와 감자도 심었다.







 친환경 농사로 새 삶을 실험 - 꾸러미 사업


2005년부터는 온전히 농민의 삶이 시작되었다. 많은 귀농인들 처럼 화학비료나 농약을 안쓰는 친환경 농사를 고집했다. 농사지을 땅도 작고 경험도 부족하다 보니 일년내 허리가 끊어질 듯 일을 했지만 손에 잡히는 소득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단위면적당 소출이 높은 시설채소로 전환을 했다. 농사도 배우고 마을사람도 알아가며 시간이 흐르는 동안 몸에 농사일이 익어가는데 반비례하여 생산물이 남아돌기 시작했다. 팔 곳이 없었다. 애써 지은 자식같은 유기농산물이 창고에서 썩어갈 때 내년에는 또 무슨 농사를 지어야하나 고민하는 긴 겨울밤이 계속되었다. 농산물 판로의 안정을 위해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 꾸러미사업이었다. 회원을 모집해서 회비를 받고 매달 생산되는 농산물을 보내주는 형태였다. 매월 3만원씩 회비를 받고 그에 상응하는 농산물을 보내주는 것이었다. 감자부터 김장김치까지 매달 회비를 보내주는 회원들에게 정성껏 보내주었다. 판다는 생각보다 나눈다는 생각이었고,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후원을 받는다고 여겼다. 그러다보니 한 두 가지의 작물을 집중적으로 생산하는 단작에서 여러 가지의 작물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비닐하우스의 규모도 늘렸고 꾸러미 회원도 45명까지 늘어났다. 안정적인 월 소득이 생기니 삶이 든든한 토대를 갖기 시작했다. 꾸러미 회원에게 보내고 남는 농산물은 생협으로 보내거나 직거래를 하기도 했다.






사회적 약자 보살펴야겠다는 사명감 깨어나


그렇게 농사에 전념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2005년 겨울로 기억한다. 마을에서 한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갑자기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남 일 같지 않았다. 내 아이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학교를 마치면 갈 데 없는 아이들, 방치된 아이들의 문제는 사회적인 문제고 어른들의 책임이라는 각성이 일었다. 오랫동안 인권운동을 하며 내재화된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감성이 깨어났다. 마을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학원을 다니는 학생도 없었고 학원버스도 오지 않았다. 마을회의에서 총대를 메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송화초등학교 교장을 찾아가 방학 때 교실 하나만 내달라고 부탁을 했다. 자원봉사자를 구하고 아이들을 지도해줄 선생님도 수소문했다. 마을에 있는 인력을 총동원했다. 미술을 가르쳐 줄 선생님, 음악을 가르쳐 줄 선생님도 수배했다. 인근 군부대를 찾아가서 체육을 지도해 달라고 부탁도 했다. 아내도 힘을 보탰다. 그렇게 해서 겨울방학 때 아이들이 학교에 와서 다양한 교육과 활동을 받고 귀가할 수 있게 되었다. 2005년 겨울에 문을 연 첫 계절학교였다. 여름이 되자 마을 주민들이 여름학교도 하자고 요청해왔다. 여름학교도 열었다. 그러자 매일 방과후 학교를 열자는 학부모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2007년 3월 고탄리 마을회관을 빌려 방과후 공부방이 문을 열었다. 자활후원기관의 도움도 있었고, 시의 도움을 받아 하나하나 법적 요건도 갖추어 10월에는 마침내 지역아동센터 등록도 했다. 등록이 되면서 시의 지원금이 생기면서 운영비에 허덕이던 공부방이 점차 안정이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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