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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에 살어리랏다! 귀산촌 이야기> 귀산촌은 삶의 목표가 바뀌는 것①

대한민국 산림청 2017. 9. 6. 13:30

성공 귀산촌人 - 박희축씨



 충북 옥천군의 어느 사립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박희축씨는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교육자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잘 풀어야만 교감이나 교장이 될 수 있는 현실 앞에서 좌절했다. 그는 명리학을 공부하면서 “한적한 곳에서 사주카페를 운영하며 노후를 보내고 싶다”는 꿈을 실천했다. 2008년, 그의 나이 50세였다. 아내를 설득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물론 아내는 여전히 옥천군으로 출퇴근한다. 돌아온 고향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사분오열된 마을의 인심이었다. 주민 간 불신과 갈등으로 마을사업은 좌초하고 있었다. 주민들의 요구로 그는 마을사업에 대표가 되어 호롱불마을 영농조합 법인을 설립했다. 2009년에는 법인 대표, 마을 이장, 종중 총무까지 맡아 새벽부터 밤늦도록 마을일로 정신없이 살았다. 그가 마을일을 맡고나서 8년, 내부의 갈등도 봉합되고 법인의 재산도 늘었다. 관광객 수도 늘고, 각 기관들의 후원도 조직해내면서 흑자 경영으로 안정괘도에 올라섰다. 호롱불마을은 65가구 중 60가구가 같은 성씨를 쓰는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이곳에 새로운 사람이 귀농·귀산촌해서는 쉽게 융합되지 않는다. 그래서 집성촌에 필요한 건 ‘귀향운동’이라고 박희축씨는 생각한다. 당초 그가 꿈꾼 사주카페는 아직 시작도 못했지만 그는 변화 발전하는 마을을 보며 마을일에 푹 빠져있다.





 유유자적하고 싶어 귀향


전북 무주군의 호롱불마을영농조합법인의 대표를 맡고 있는 박희축씨. 2008년 고향으로 돌아온 어찌 보면 새내기 마을 주민이다. 호롱불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랐지만 고등학교 진학 이후 마을을 떠나 살았다. 대학을 졸업한 후 인근 옥천군에서 20년간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사는 곳이 고향과 가깝기도 했고, 고향엔 여전히 형님을 비롯한 친인척들이 살고 있어 자주 방문하여 유대가 끊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마을의 살림살이에 관해서만큼은 완전히 국외자인 처 지에서 귀향했다. 그가 귀향한 목적은 마을일과는 전혀 관계없는 극히 개인적인 목표를 안고 돌아온 것이다. 사립 고등학교에서 전산을 가르치는 교사였지만 정신적으로 역마살이 끼었는 지 명리학에 빠져서, 고향의 조용한 곳에 집을 짓고 사주카페를 열고 유유자적하며 세월을 낚고 싶었다. 연금도 나오고 하니 약간의 수입만 보태면 생계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사립학교에서 승진하는 것은 인간관계가 좌우하는데 그런 것도 영 마뜩찮았던 것이다.


“사립학교라 로비가 중요해요. 인간관계가 승진의 관건인데, 그런데는 소질이 없어서 더 이상 교사생활에 흥미를 잃었지요. 교육자로서 능력을 발휘하면 뭐합니까? 엉뚱한 사람들이 교감, 교장하는데...” 고향으로 돌아와 사주카페 짓고 유유자적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자 아내가 반대하고 나섰다. 공무원인 아내가 출퇴근에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내를 달래려고 고급 승용차를 선물했다. 그렇게 돌아온 고향이었는데 돌아와 보니 엉뚱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민 간 불신과 갈등으로 마을사업 좌초


마을엔 몇 년째 이장이 없었다. 이장 공백상태. 주민들 간의 갈등으로 이장조차 뽑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마을의 다른 일들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처음엔 마을에서 정부사업을 유치하기 위해 계획안을 작성해야하니 문서작업을 도와달라고 해서 응했을 뿐이었다.


50살이 되어 고향에 돌아왔지만 그는 마을에서 거의 막내뻘이었다. 마을 주민 평균연령이 70대 중반이라 할 만큼 고령화가 진행되어 문서작업을 할 사람마저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막상 박씨가 교사시절 경험을 살려 입안한 산촌생태마을 계획안이 통과되어 예산이 나오자 마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주민들 서로간의 불신이 팽배해 막상 계획을 주도한 측이 사업을 진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립한 양측은 공정하게 일을 집행할 사람으로 새내기 주민이었던 박씨를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고민에 빠졌다. 고향에 빈집 하나 빌려서 들어온 처지에 대규모 마을사업을 이끄는 대표를 맡아야 하다니. 그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옥그릇이었다. 빌려서 들어온 집은 할머니가 살던 집으로 얼마 전 요양원으로 급히 가면서 애지중지했을 옥그릇마저 그대로 두고 떠나간 것이었다. 그 분들의 삶의 역정이 떠오르고,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마을 사람들의 마을사 삶으로 감정이입이 되었다. ‘그래, 몇 년 만이라도 이 분들을 위해 일을 하자’ 그렇게 마음먹고 3년 사업기간의 마을사업을 이끌 위원장직을 맡기로 했다.





무주 설천면 기곡리 ‘호롱불마을’은 덕유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맑은 남대천이 감싸고도는 마을이다. 5 백 년 전 선조들이 들어와 사람살기 좋은 첫 번째 터라고 해서 ‘터일’이라고 불렸다는 마을로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마을을 이루는 65가구 중 새로 귀촌한 5가구를 제하면 60가구가 같은 성씨를 쓰는 마을이니, 호롱불마을은 여전히 살아있는 마을공동체다.


자본주의 산업화가 가장 먼저 손을 댄 농·산촌공동체의 해체 물결에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섬과 같은 곳, 그곳에 요즘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그 변화의 바람은 마을 이름에서 느낄 수 있다. 터가 좋다는 뜻에서 유래한 기곡리가 귀곡리와 발음이 비슷해 느낌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호롱불마을’로 바꾸고 대대적인 홍보작업까지 하고 나선 것이다.





그 과정엔 역시 정부의 돈이 한몫을 했다. 산촌생태마을, 녹색농촌체험마을 등 정부의 굵직한 예산지원사업을 유치하려는 마을의 노력과 그 결과물들이 마을의 지도와 외관을 바꾸면서 마을 구성원들의 삶의 양식마저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박희축씨가 있었다. 행정자치부 선정 정보화마을의 위원장을 맡고 있기도 하고 산촌생태마을, 녹색농촌체험마을 위원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09년에는 법인 대표, 마을 이장, 종중 총무까지 맡았어요. 그 세 자리가 마을을 움직이는 핵심 축이에요. 행정을 대표하는 자리가 이장이고, 마을 살림살이를 대표하는 자리가 법인 대표, 거기다 집성촌에서 종중 총무까지 맡았으니 얼마나 바빴는지 모릅니다. 월급이라곤 이장 월급이 전부인데 새벽부터 밤늦도록 마을일로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마을일 8년 만에 내부 갈등 사라져


위원장을 맡으며 한 첫 번째 일은 마을사업을 진행할 호롱불마을 영농조합법인의 설립이었다. 한 사람의 독주를 막기 위해 출자 제한을 두어 법인을 설립한 결과 거의 마을의 전 가구라 할 수 있는 56세대가 조합원이 되었다. 1억 원이 출자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마을일이 8년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다. 그동안 많은 정부지원사업을 유치했다. 녹색농촌체험마을을 비롯해 마을정보화사업, 동네마당사업, 마을기업, 맛체험마을, 산촌생태마을, 거점마을사업 등. 이 모든 사업을 단 한 번의 응모로 선정되었다. “공무원들이 사업을 시행하게 된 원인을 분석해서 그 요구에 맞게 사업계획안을 작성하면 됩니다. 물론 계획안이 실행될 수 있도록 마을 주민들을 교육하고 조직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지만요.”


그가 일을 하고 나서 표면적으론 마을의 갈등이 사라졌다. 마을의 재산이 법인으로 묶여있는 탓이고, 또 법인이 한 두 사람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가 계속 마을일에 묶여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마을주민들이 한결같이 ‘너를 보고 출자를 했으니 네가 끝까지 책임을 져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마을일을 하고 나서 8년, 내부의 갈등도 봉합되었고 법인의 재산도 늘었다. 관광객들도 늘고, 각 기관들의 후원도 조직해내면서 많지는 않지만 흑자를 내면서 안정궤도에 올라섰고, 교육청으로부터 폐교부지와 건물을 매입하면서 기반도 튼튼히 했다. 매입비용만 4억 원이었다. 그걸 매년 조금씩 갚아나가는 중이다. 2015년에는 전라북도 행복마을 컨테스트에서 1위를 수상하기도 했다. 마을 갈등으로 이장도 뽑지 못하던 마을에서 8년 만에 환골탈태한 것이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마을사업을 꾸리며 직간접적으로 마을 주민들의 소득향상에도 기여한 그지만 그가 마을을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다. “정부 정책에 문제가 있었죠. 5 백년간 문화공동체로 잘 살고 있던 마을이었어요. 그런데 정부가 이런저런 사업으로 마을에 돈을 줘서 갈등을 일으킨 거죠. 그 갈등을 봉합하고 다시 마을공동체를 복원한데 의미를 두고 싶어요.” 그래서 그가 생각하는 귀농·귀산촌도 정부의 생각과는 다르다.





집성촌을 유지하고 있는 마을에 귀농·귀산촌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은 아직까진 갈등요소밖에 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낯선 사람들이 들어와서 쉽게 융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성촌에 필요한 건 귀향운동이에요. 저처럼 여기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도시에 나가 살고 있는 몇 명의 사람들과 구체적인 얘기를 주고받고 있다. 그들이 돌아와서 마을에서 경제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토대도 만들고 있다. “귀향운동이 중요합니다. 귀향하면 문화갈등이 일어나지 않고 문화접변이 일어납니다. 윈윈입니다.”







#내손안의_산림청,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