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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에 살어리랏다! 귀산촌 이야기> 마을활동가 - 윤영민

대한민국 산림청 2017. 9. 13. 09:30



성공 귀산촌人 - 윤영민씨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1980년 광주에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윤영민씨의 삶을 지배했던 것은 80년 5월 광주였다. 그의 삶의 이유는 ‘살아남은 자의 몫을 하는 것’이었다. 학생운동, 노동운동으로 불같은 삶을 살았다. 그가 사회운동을 접고 산촌 마을활동가로 첫 걸음을 뗀 까닭을 그는 ‘정신적인 피로’로 설명한다. 사회운동을 계속할 수 없을 만큼 피로가 쌓였고, 그 피로는 삶에 대한 근본적 회의로 이어졌다. 작은 일을 하더라도 성과가 축적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2003년 가을, 땅도 집도 사지 않고 담양의 운수대통마을로 온 가족이 몸만 들어왔다. 13년을 산 후에야 집지을 땅을 구입하고 전남 한옥행복마을 사업비 융자와 지원을 받아 2015년에 완공했다. 2013년 산촌생태체험마을 사업에 선정되어 마을 사업을 운영할 주체로 (사)수양산참삶골 사람들을 설립했다. 다른 마을들은 대개 영농조합을 만들지만 윤영민씨는 사단법인을 고집했다. 영농조합의 경우 자격조건이 까다로워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기 어렵고 이익 분배에 대한 논쟁이 생길 수 있어 사업성과를 개별 분배하지 않고 사업을 통해 환원하는 사단법인을 만들어 공익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는 소득보다 마을공동체가 우선이라 생각한다. 즉 마을은 지역공동체에서 출발해 경제공동체, 문화공동체, 생활공동체로 나아가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지향한다.






 불처럼 살았던 사회운동가


우리 사회에서 50대들에게 1980년 5월의 광주는 단순히 역사적 사건에 머물지 않는다. 그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결정된 사람들이 많다. 담양의 운수대통마을의 윤영민씨도 그 중 한 명이다. 5월의 광주민중항쟁을 떠나서는 그의 삶이 설명되지 않는다. 당시 그는 광주에서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살아남은 자의 몫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으로 20년을 보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학생운동을 했고, 대학을 나와서는 노동운동을 했다. 대학도 정상적으로 졸업하지 못했다. 대학을 떠난 지 30년이 넘은 2016년 초 대학측으로부터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2003년 귀산촌을 결정할 때까지 그는 민주화운동, 혹은 사회운동가로 불렸다. 그렇게 20년을 사회운동에 몸 바쳤던 그가 방향을 튼 것은 개인적인 필요 때문이었다. 지쳤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딱히 질병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몸이 안 좋다고 느낀 것은 정신적인 피로감 때문이라고 스스로 진단한 것이다. 더 이상 도시에서 사회운동이라는 긴박한 전선에서 삶을 이어가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사회운동이란 것이 조직과 투쟁을 양 축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인간관계와 사회적 이슈에 따라 부침을 거듭할 수밖에 없는, 이른바 스트레스가 엄청난 일이었다. 지치기도 했고 회의가 들기도 했다.




 마음의 본향을 찾아 귀산촌


“삶의 속도, 일의 속도가 느리더라도 뭔가 경험이나 일의 성과들이 축적되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농·산촌으로 눈을 돌렸다. 마음의 본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30대까지 불을 닮은 삶을 살았다면 앞으로는 물을 닮은 삶을 살고 싶었다.


어머니께 그런 말씀을 드렸더니 ‘고향으로만 돌아오지 마라’고 했단다. 그래서 찾은 곳이 담양 운수대통마을이었다. 이곳엔 먼저 귀산촌한 친구가 들어와 있었다. 그와 손발을 맞추면 재밌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박한 농촌운동에 대한 꿈도 있었다. 교직에 있던 아내도 출퇴근에 문제가 없다면서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그의 아내는 지금도 교직에 있으면서 그의 버팀목이자 가장 큰 후원자이기도 하다.


마을에 있는 종중의 제각을 수리해서 쓰는 조건으로 이사를 왔다. 땅도 집도 사지 않고 온 가족이 몸만 들어온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13년을 살았다. 집 지을 땅을 구입한 것은 2012년이 되어서였다. 집을 지은 것은 전라남도의 한옥행복마을 사업비 융자와 지원을 받아 2015년에 완공하였다. 당시 운수대통마을에서만 10여 가구가 한옥행복마을 사업에 참여해 골짜기 따라 들어선 한옥들이 마을의 경관을 푸근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전형적인 산촌에 맞는 영농조합 설립


그가 마을에 들어와서 처음 한 일은 우리콩영농조합을 만든 일이었다. 마을은 전형적인 산촌이다 보니 전답들의 규모들이 작아 대규모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없었고, 윤씨 역시 땅을 빌려 여러 가지 작물을 조금씩 짓는 소농 복합영농으로 귀산촌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농사를 지으며 마을사람들과 관계를 쌓아오다 뜻이 맞는 8명이 모여 만든 것이 바로 콩을 이용한 메주와 된장과 간장을 생산하는 영농조합이었다.


그렇게 만든 우리콩영농조합은 지금까지 잘 운영되어 마을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된장과 간장은 몇해전부터 한살림 전남광주 지역에 납품되고 있고 2016년부터는 전국 한살림에 납품한다. “마을은 성씨가 다양하고, 수용력이 있습니다. 1906년 의병이 기병하고 본영으로 썼던 곳인 만큼 외부인에 대한 텃새가 심하지 않은 편이었죠. 제가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이런 촌구석에 들어와서 뭘 해먹고 살거냐’ 하는 걱정이 많았지 텃새는 없었죠.”



마을의 수용력도 있었고, 오랜 사회운동을 통해 길러진 친화력도 있어서 그는 귀촌한지 5년만에 마을 이장이 되었다. 이장이 되어 유치한 사업이 녹색농촌체험마을이었다. 사업을 유치하기 위한 마을회의가 이어졌다. 그때 그가 강조한 것은 ‘전 주민이 동의할 수 있는 사업을 하자’였다. 외부의 도움 없이 마을 주민 공동의 요구에 기초해서 사업안을 만들어갔다. 사업안이 통과될 경우 이를 실행해낼 준비까지 마쳤다. 마침내 사업이 선정되었고, 그 결과로 마을회관 신축사업을 해낼 수 있었다. 회관은 교육, 회의, 숙박이 가능한 다목적 공간으로 향후 체험마을 사업을 펼치겠다는 계획이 설계에 반영되었다.



 공익적 접근으로 갈등의 씨앗 제거


체험마을 사업을 할 수 있는 다목적공간으로 회관을 신축한 까닭은 마을의 지리적 입지 때문이었다. 마을은 규모가 크지만 거의가 산지라 경제력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도농교류를 활성화시킬 거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관광, 문화, 교육 등의 컨텐츠를 개발하여 마을의 자원들과 결합시키는 것으로 비전을 잡은 것이다. 다목적공간은 이도향촌센터, 귀농귀촌귀향센터의 역할도 함께 한다. 방향을 그렇게 잡고 마을 내부 역량 강화를 위해 곶감작목반, 약초작목반도 만들어 산촌생태마을의 특징을 살려나갔다.





회관이 완공되고 목표했던 체험마을 사업이 궤도에 올라서면서 찾아오는 도시민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정부의 산촌생태마을 사업에도 선정 되면서 마을의 변화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를 효과적으로 운영할 주체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사)수양산참삶골사람들이었다. 2013년이었다. 대개의 마을들은 운영주체로 영농조합을 만들지만 운수대통마을은 사단법인의 형태를 취했다. 법인의 대표는 윤영민씨가 맡고 있다. 그는 지금 전남 산촌생태마을 협의회 회장도 겸임하고 있다.


“산촌활성화의 관건은 사람입니다. 수익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이 모여서 일을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공익적인 일을 해보자, 공익적인 가치를 실현해보자, 고 뜻을 모았습니다.”


그가 사단법인을 고집한 데에는 타 지역의 경험도 도움이 되었다. “영농조합을 보니 조합원이 되는 자격조건이 거주기간, 농업인 등 까다로운 경우가 많아요. 대상을 협소하게 하면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기가 어렵죠. 그래서 마을의 지속성이 담보될까 하는 의문이 생겼어요. 또 이익분배에 대한 논쟁이 생길 수밖에 없고요. 사단법인은 사업의 성과에 대해서는 분배할 수 없고 사업을 통해서 환원할 수만 있습니다. 문화사업, 교육, 장학사업을 통해서 말이죠. 마을의 갈등이 생기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다행히 모두가 동의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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