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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에 살어리랏다! 귀산촌 이야기> 내일이 아닌 오늘을 선택한 귀촌 ①

대한민국 산림청 2017. 7. 13. 13:30

<산촌에 살어리랏다! 귀산촌 이야기>

내일이 아닌 오늘을 선택한 귀촌

- 박기윤





 경북이 고향인 박기윤씨는 대학진학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20여년을 살았다. 직장생활도 하고 조그만 개인사업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에게 사고가 생겼다. 사고의 여파로 부모님이 잇따라 사망했다. 한 순간에 집안이 반 토막이 난 것이다. 그는 방황했다. 삶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일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그에게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너희들이 어릴 때가 가장 행복했다”는, 궁핍했던 시절이 행복했다는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이 그에게 화두가 되어, 그는 도시의 삶을 접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접었다. 그저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보낼 수 있는 삶을 살자.1년을 헤매다 온 곳이 처가의 고향인 강원도 화천이었다. 2004년 귀산촌해서 6년이 지나 어느 정도 산골살이가 안정되면서 마을일에도 두루 관계하게 되었다. 2010년 농사일과 산골살이에 필요한 기술을 한곳에서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현장중심의 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느껴 ‘화천현장귀농학교’를 개교했다. 장기숙박형 현장교육은 3월에 입학해 11월에 졸업한다. 농사일의 한해살이를 다 경험하는 유일한 교육기관이다. 2016년 7기까지 졸업생은 60여명에 이른다. 이 중 70%가 귀농·귀산촌 했다.




 지금까지 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자


강원도 화천군에서 현장귀농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박기윤씨. 경북이 고향인 그는 대학 진학과 함께 서울로 상경하여 직장생활을 하고 개인사업까지 하면서 근 20년을 서울에서 살았다. 평온한 가정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순간 갑자기 동생에게 사고가 발생했다. 그 여파로 부모님이 잇따라 돌아가시면서 집안이 한순간에 반 토막이 나고 말았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응급실 갔다가 죽고, 또 연이어 다른 사람이 중환자실 갔다가 죽어 나갔다. 삶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들었다. 굉장히 힘들었던 시기였다. 사는 게 뭔지 하는 답 없는 질문들만 던지는 시간이었다. 그 무렵, 돌아가시기 직전의 어머니에게 질문을 드렸다. “언제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놀랍게도 어머니의 대답은 너희들이 어릴 때, 초등학생 무렵이라고 대답하셨다. 박교장이 기억하는 그 시절은 견뎌내야 하는 시절, 먹을 것도 부족하고, 학교 육성회비도 못내는 궁핍한 시절이었다. 참고 견디며 이 어려운 시간만 보내고 나면 나중에 행복이 찾아올 올 것이라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행복은 미래에 있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어머니는 어제였다고 말씀하고 계셨다. 박교장은 충격을 받았다. 과연 인생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가? 그 얘기를 곱씹으며 그는 다른 삶을 희망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살아보자. 내일은 생각하지 말고, 계획이라는 것도 세우지 말고그저 오늘 하루만 충실하고, 거기서 행복해하자” 고 말이다. 그렇게 살기에 가장 좋은 곳은어딜까? 시골이다. 시골로 가자.




 현장중심의 귀농·귀산촌 교육 필요성 느껴


무작정 내려왔으니 시골살이에 대해 아는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농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도움을 받을 사람도 없었다. 시골에 와서 살려고 마음을 먹고 나서부터 전혀 준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마음가짐만은 잘 준비했다. 하지만 마음만으로, 철학만으로 생활이 구성되는 것은 아니었다. 농사를 지을 줄도 모르고 퇴비를 만들 줄도 몰랐다. 집을 지을 땅은 마련해 놓았지만 집을 지을 줄 아나, 구들을 놓을 줄 아나. 그래서 귀농운동본부에서 발행하는 책자 귀농통문 등을 보면서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정보를 수집해서 전국을 다녔다.


춘천에 있는 강원도농업기술원 가서 경운기·트랙터 배우고, 구들 놓는 법을 가르쳐주는 곳도 가고, 미생물 발효시키는 방법, 자연요법도 배우러 다녔다. 무주며 지리산이며 참으로 멀리도 다니면서 하나하나 시골살이에 필요한, 유기농업에 필요한 기술들을 배웠다. 지역에 와서 보니 지역사람들은 거의 만능이었다. 보일러 고장 나면 직접고치고, 기계 고장 나도 직접 뜯어 고치고, 용접도 직접하고. 시골 사람들은 생활인이고 생존기계 같았지만 도시에서 온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세운 1차 목표는 단순했다. 빨리 지역사람이 되자. 아! 산골살이와 농사일에 필요한 기술을 한 곳에서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화천현장귀농학교는 그런 박교장의 귀산촌 적응과정의 산물이다. 박교장과 귀산촌 적응과정을 오롯이 함께 한 사람이 있다. 현재 학교의 교육팀장을 맡고 있는 백승우(48)씨다. 그는 박교장 보다 딱 한 달 먼저 화천에 귀농했고, 둘은 귀농통문을 통해 알게 되었다. 둘 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시골살림에 막힘이 없게 되고 농사일도 안정이 되면서 마을일에도 두루 관계하던 때였다. 화천군청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화천군이 도시민 유치지원사업에 선정이 되어서 도시민을 위한 교육, 체험 사업을 펼쳐야하는데 좋은 의견을 달라는 것이었다.





마을일을 하게 되면서 인적 네트워크가 넓어진 탓이었다. 마을일이란 것이 정부 공모사업에 응하다 보면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많다. 산촌생태마을 등 대부분의 서류가 박교장과 백팀장의 손을 거치다 보니 군에서도 아이디어를 구한 것이다. 그래서 낸 의견이 현장귀농학교였는데 화천군이 이를 받아들여 2010년부터 개교를 하고 교육생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엔 마을회관을 빌려 교육을 하고, 교육생의 숙소는 동네 노인정을 빌려서 사용했다. 그러다 임차했던 곳이 나가면서 현재의 건물로 이사를 왔다. 물론 화천군에서 제공해준 것으로 폐교를 리모델링한 건물이다.


귀농·귀산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귀농·귀산촌 교육을 실시하는 기관이 늘어났지만 박교장과 백팀장이 주목한 것은 장기숙박형 현장교육이었다. 일주일이나 열흘 단위의 단기 교육과정은 농사의 전 과정을 체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씨 뿌릴 때 잠깐 와서 보고, 수확할 때 와서 체험하는 형태의 귀농교육이라는 것은 삶과 단절되어 있다는 것, 농사라는 것이 단순히 투입과 산출이라는 경제적 관점에서만 바라봐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농사의 한 사이클을 다 겪어가면서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 과정이 귀농·귀촌의 핵심과 만나는 길이라고 여겼다.




#내손안의_산림청,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