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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숲> 이 땅에 따뜻한 씨앗을 심다, 문익점

대한민국 산림청 2017. 12. 19. 13:30




글. 박남일(역사 칼럼니스트), 일러스트. 정윤미



 “우리 처음 만난 곳도 목화밭이라네…” 나이 지긋한 사람이면 누구나 흥얼흥얼 따라 부를 만큼 잘 알려진 노래. 제목도 ‘목화밭’이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사랑을 속삭이던 그 옛날 목화밭에 대한 그리움이 노랫말에 철철 넘친다. 미국의 포크 가수 레드베리가 1940년대에 내놓은 전설의 명곡 ‘목화밭(Cotton Fields)’을 한국식으로 리메이크 한 것이다. 원곡 또한 흑인 노예의 후손으로 태어난 레드베리의 어린 시절 목화밭에 얽힌 추억을 담고 있다. 목화는 두 번 꽃이 핀다. 늦여름에 흰빛이나 자줏빛 꽃이 피고, 늦가을에는 쩍 벌어진 열매에서 하얀 솜꽃이 핀다. 노래가 절로 나올 만한 정경이다. 그 따뜻하고도 아름다운 목화 씨앗을 이 땅에 처음 심은 이는 고려 후기 문신 문익점(1329~1398)이다.



 문익점은 왜 목화씨를 밀반입했을까?


문익점의 ‘목화씨 반입 스토리’는 너무나 유명하다. 대략 내용은 이렇다. 고려 공민왕 때인 1363년, 좌정언에 승진한 문익점은 서장관 임무를 받고 원나라에 갔다가 그곳 황제에게 밉보여 강남 지방에서 3년간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그때 밭에 피어 있는 목화의 하얀 솜꽃을 보자, 그 씨앗을 가져오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당시 목화는 국외 반출을 금지하는 품목이었다. 마침내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오던 길에 문익점은 목화씨 여남은 개를 몰래 따서 붓 두겁에 숨겼다. 이른바 ‘밀반입’이었다. 고려로 돌아온 문익점은 진주에 사는 장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를 시도했다. 하지만 재배가 쉽지 않았다. 첫 해에는 겨우 한 그루만 살아남았다. 3년째 되어서야 어느 정도 번성한 목화씨를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심게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안 되어 목화 재배가 온 나라로 번졌다. 이처럼 드라마틱한 스토리에 힘입어 문익점은 한반도에 목화를 보급한 선구자로 우리에게 각인되었다.


그런데 ‘목화씨 밀반입설’에 따른 논란도 있다. 먼저 문익점이 중국 강남에서 3년간 귀양살이 했다는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문익점은 1363년 봄에 원나라에 갔다가 1년도 안 되어 돌아왔다. 게다가 『태조실록』에는 문익점이 목화씨를 ‘그냥’ 얻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목화씨가 국외 반출 금지 대상이었는지도 의문이다. 그럼에도 목화씨 밀반입 스토리가 회자되는 것은 『목면화기』에 나오는 문익점의 행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남명 조식과 남평 문씨 입김이 서려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에 문익점의 ‘강남 귀양살이’와 ‘목화씨 밀반입’ 이야기가 나오는 까닭이다. 물론 문익점 사후 수백 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와전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거기에 문익점 후손들의 일정한 의도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 배경이 궁금하다.


요컨대 1363년 5월에, 원나라 순제는 반원정책을 펴오던 공민왕을 폐위하고 충선왕의 아들 덕흥군을 새 왕으로 책봉했다. 원나라와 공민왕 사이에 극도의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1364년 1월에는 덕흥군 세력이 원나라 군사 1만여 명을 끌고 의주까지 쳐들어오기도 했다. 바로 그 기간에 문익점은 원나라에 가서 목화씨를 가져왔다. 따라서 문익점은 귀국 후, 원나라에 머문 동안의 행적에 대한 검증을 받아야했다. 이에 대해 『고려사』에는 ‘문익점은 원나라에 가서 신임 왕 덕흥군 쪽에 가담하였다가 덕흥군 쪽이 패하자 1364년에 목화 종자를 얻어가지고 귀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문익점은 파직을 당하는 선에서 거취가 정리되었다. 별다른 혐의는 없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의 후손들은 『고려사』에 기록된 조상의 ‘반역’ 혐의를 벗겨내고 싶었을 터였다. 그리하여 『목면화기』에 문익점의 강남 귀양살이와 목화씨 밀반입 행적을 담았다. 일종의 알리바이였다. 문익점이 덕흥군을 지지한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하다가 귀양살이를 했다는.






 백성들에게 생활 혁명을 일으킨 목화씨


사실 문익점의 귀양살이나 목화씨 밀반입 여부가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그가 정치적 격변에 크게 휩쓸리지 않고 한반도에 목화씨를 반입하여 백성의 생활과 문화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물론 최근에는 삼국시대에도 소량의 면직물을 생산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당나라 때 역사서 『한원(翰苑)』에는 고구려에서 백첩포(白疊布)라는 면직물을 생산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삼국사기』에도 ‘백첩포 40필을 당나라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백첩포가 면직물이다. 한편 지난 2010년 7월에 국립부여박물관은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나온 백제시대 직물 1점을 분석한 결과,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면직물임을 확인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로써 한반도 목화 재배의 역사는 무려 800년이나 거슬러 오르게 됐다.


하지만 그 때문에 문익점의 업적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삼국시대에 목화를 재배하여 면포를 생산했더라도 백성에게 널리 보급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목화 재배와 목면을 대중적으로 보급한 사람은 문익점과 정천익이었다. 사실 이들도 목화 보급에는 성공하였지만 솜에서 실을 뽑고, 또 그것으로 베를 짜는 기술을 보급하기까지는 많은 난관을 넘어야 했다. 그나마 원나라에서 온 승려 홍원(弘願)이 정천익 식구들에게 실 뽑고 베 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후 정천익의 아들 문래(文來)와 손자 문영(文英)이 실 뽑는 법과 베 짜는 법을 발전시킴으로써 면포 산업은 더욱 발전했다. 실 뽑는 기구를 뜻하는 ‘물레’와 그 실로 짠 면직물을 부르는 ‘무명’이라는 말이 문래, 문영 부자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속설도 있다.
그렇게 발전한 면포 생산으로 인해 백성들은 따뜻한 옷과 푹신한 솜이불을 얻을 수 있었다. 삼베옷 한두 겹으로 한겨울 추위를 견디던 백성들에게는 이보다 고마운 선물도 없었다. 문익점이 보급한 목화와 면포 생산은 조선시대 들어와서 사회경제적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문익점으로 인해 한반도에 새로운 산업이 탄생한 것이다. 그 산업을 적극 장려했던 조선 세종은 문익점이 백성을 풍요롭게 만들었다며 그를 ‘부민후(富民侯)’로 추증토록 했다. 또한 조선시대 영남학파의 영수 남명 조식은 문익점을 ‘백성들에게 옷을 입히니 후직(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임금)의 공과 같다’고 했다.


문익점이 이 땅에 심은 따뜻한 씨앗은 6백 년에 걸쳐 헐벗은 백성들의 체온을 지켜주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목화는 지금 이 땅에서 재배되지 않으며, 씨앗을 찾기도 어렵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것은 아시아 종이었는데, 한반도에서는 이미 20세기 초반에 개량종인 육지면으로 대체된 까닭이다. 그러나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과 정천익이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했다는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址)’ 유적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또한 인근 도천서원에서는 지금도 남평 문씨 후손들이 매달 상에 목화솜을 올려놓고 제사를 지내며 문익점의 부민(富民)정신을 기린다고 한다. 그 따뜻한 정신이 더 넓게 더 멀리 이어져야 할 것이다.


*문익점(1329~1398)은 고려 말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중국 원나라에서 목화 씨를 들여와 목화재배와 면포 생산을 연구하고 대중적으로 보급했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이 목화를 재배했다는 ‘목면시배유지’ 유적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인근 도천서원에서는 지금도 남평 문씨 후손들이 매달 상에 목화솜을 올려 제사를 지내며 문익점의 부민정신을 기리고 있다.


*목화는 아욱과 한해살이풀이다. 씨앗을 맺을 때 생기는 털을 이용해 솜을 만든다. 꽃과 목화송이 둘다 아름다워 꽃이 두 번 피는 식물이라고도 칭한다. 목화 한 송이는 3~5개 뭉치로 되어 있는데 섬유를 이으면 길이는 1km가 넘는다. 씨앗으로는 기름을 짜는데, 면실유라고 한다. 국내 목화 농업은 조선시대 때 일본에 수출까지 했을 정도로 기반이 단단했다. 화학솜과 수입 목화에 밀려 오늘날 산업용 국산 목화는 생산량이 매우 미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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