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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기록한 사람> 잃어버린 순수를 만나는 시간, 산악사진가 이상은

대한민국 산림청 2018. 2. 28. 11:00





 세계의 험하다는 웬만한 산은 접수한 그녀에게 의외로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거기에 깃들어 사는 사람 때문에 산으로 향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의 순수한 눈망울과 이야기가 궁금해서 자꾸만 들여다보고 싶단다. 그녀에게 산은 거칠고 위험한 곳이 아니라 꿈이 부풀어 오르고 풍요로워지며, 영혼을 다독이는 따뜻한 공간이었다.






 자주 들여다보니 좋아지더라


“덕유산의 계절이 왔어요. 물론 산은 계절마다 아름답지만 덕유산은 겨울에 가장 예쁜 산이에요. 하늘은 파랗고 산은 하얗고, 그 경계에 검은 선만 있는 선명함 때문이에요. 일상에서는 참 많이 마음이 다치잖아요. 거기에 가면 이렇게 단순명료할 수 있는데, 내가 왜 연연해했을까를 일깨워줘요.”


덕유산에서 지금의 남편에게 청혼을 받았다. 의미가 있어 자주 가게 됐고, 자주 가니 들여다보게 됐다. 들여다보니 예쁜 구석이 많아 좋아졌단다. 쿰부 히말라야 니레카봉(6,159m)을 세계 최초, 터키 최고봉 아라라트(5,135m)를 한국인 최초로 오른 베테랑 산악인에게서 돌아온 대답이 의외였다. 단단해 보이는 그녀의 마음에도 생채기가 난다는 것에, 산을 사랑하게 된 계기가 참 소박하다는 것에.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5,895m), 중미 최고봉 오리사바(5,747m)를 등반했고, 안나푸르나, 에베레스트, 랑탕 등 히말라야 3대 트레킹과 남미 안데스 산맥의 유명하다는 트레일을 거의 다 섭렵한 그녀이니 말이다. 기사에 더 극적인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조바심에 히말라야 이야기를 해달라고 채근했다.






“제1회 아시아여성합동등반대회의 대한민국 대표로 선발돼 히말라야를 오르게 됐어요. 미답봉을 밟았을 때의 희열이야 참 좋았죠. 그런데 그 고취감이 오래 가진 않았어요. 한 번 해봤으니 이 정도면 됐다, 싶었으니까요. 당시 산악인 오은선 언니와 함께 올랐는데, 산은 저렇게 집념이 강한 사람이 오르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또 의외의 이야기다. 산을 정복했을 때 뜨거운 성취감, 혹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무용담은 없었다. 그녀가 히말라야에서 진정으로 얻은 것은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보니 거기에도 사람이 있더라고요. 히말라야 아이들과 마주쳤을 때 느낌을 잊지 못해요. 꼬질꼬질한 옷을 입고 고사리 같은 손을 한 아이들에게 공책 한 권씩을 선물했는데, 너무나 기뻐하고 고마워하는 거예요. 찡하고 이상했어요. ‘이 감정은 뭘까’하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거기에 제 어릴 때 모습이 있었어요. 작은 것에 감동하고 감사하는. 원래 내 안에 있던, 잃어버린 순수를 다시 만난 느낌이었습니다.”


정상으로 향하는 것 보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자꾸 궁금하고, 그들에게 말을 걸고 싶다는 그녀가 사진을 찍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상에 가서 깃발을 꽂는 일도 참 멋지지만, 그녀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에 더 마음이 간다.


“말은 안 통하지만 오지 아이들의 눈빛을 보면서 온몸의 세포로 느껴요. 아, 오길 잘 했다. 다음에 또 와야지. 이 행복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눠야지.”


고된 등반 중에서 네팔 오지에 머물며 학교 건립 봉사활동을 참여하거나, 거기서 <180일간의 아름다운 동행, 희망학교 짓기> 사진전을 개최하기도 한 그녀다. 얼마 전엔 영어동화책을 모아 보냈고 2015년 지진 피해가 났을 때도 임시로 거처할 수 있는 텐트를 보내는 등 네팔 아이들과의 인연은 계속 되고 있다. 그녀가 산으로 향하는 이유, 역시 사람인 것이다. 사진 역시 그 만남의 순간을 오래 담아두고자 하는 수단이다.






 먼 곳의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


산은 그녀에게 마음의 둘레를 보다 넓게 확장시켰다. 그곳에 평화가 깃들길, 그곳의 아이들이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길 늘 기도한다. 평생 다시 못 만날 지도 모를 그들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한국인 최초로 등정한 터키 아라라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라라트는 크루드족의 성지인 곳으로, 터키 정부와 크루드족 반군의 무력 대립이 계속되고 있던 당시 매우 위험한 여행지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이야기는 태연자약할 정도다.


“물론 가기 전엔 다들 말렸죠. 그런데 다른 사람들의 말은 제가 진짜 경험한 게 아니잖아요. 가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제가 만난 크루드족은 너무나 순박했어요. 그곳을 한국인 최초로 등정한 건 물론 행운이었지만 해발 5,000m에서 가이드와 밤새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묵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기억, 크루드족 아이들의 초대를 받아 따뜻한 우유와 차 한 잔을 나눴던 기억이 더 소중합니다.”


그녀의 특별한 여행은 여전히 현재진행중이다. KBS <영상앨범 산>에 9년 넘게 출연하면서 세계의 산과 길을 소개하고 있고, 2018년 역시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알프스, 파타고니아, 부탄 등의 여정이 계획되어 있다. 험한 오지의 길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외롭지 않을까 싶지만, 이상은 산악사진가라면 그럴 걱정도 없겠다.






“인도 카슈미르주 라다크를 2016년과 2017년에 갔다 왔어요. 해발고도 3,500m인 그곳을 비행기로 바로 가면 고산병으로 쓰러져요. 델리에서 이틀간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해요. 도착하면 아무 것도 없어요. 살아있는 것은 염소와 양, 야크, 풀, 그리고 저예요. 해발 4,500m를 넘어가면 그 풀마저 키가 손톱만해요. 여기선 인간이라는 존재가 덧없죠. 염소나 풀, 그리고 내가 다를 게 없거든요. 그럴수록 오롯이 나를 들여다보게 돼요. 또렷하게 내가 보여요. 혹한의 메마른 땅에서 버티고 있는 저 풀처럼, 내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워요.”


그렇게 자신과 직면하고 오면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불편하고 험한 곳일수록 다시 가고 싶은 이유다. 화려한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중요한 것은 언제나 길 위에 있는 것. 삶의 목표를 묻는 질문에 그녀가 건넨 대답이다. 그래, 또렷한 나와 마주친 적이 얼마나 있던가? 그녀의 따뜻한 영혼이 향할 그곳으로,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 순간이었다.



※ 본 콘텐츠는 산림청 격월간지 '매거진 숲'에서 발췌한 기사입니다.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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