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각지의 왕릉이라고 부르는 곳을 다녀보면 공통적으로 소나무가 조성된 특징을 보이는데요. 소나무의 특성상 사계절의 변함없이 녹색의 빛깔을 드러내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은 마치 병풍 혹은 호위무사를 방불케 합니다. 생각해보면 소나무는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했는데요. 집을 만드는데도, 아이가 태어났을 때 금줄에도 소나무가 활용이 되었습니다. 또한 묘에 쓸 관 역시 소나무를 썼으니, 소나무의 상징성이란 그야말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해도 틀린 표현이 아닙니다.
갓을 쓴 듯 제법 울창한 소나무 숲을 마주할 수 있는데, 그나마 관리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공양왕릉의 모습
그렇기에 소나무가 울창한 왕릉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관이자, 역사의 현장이라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조선왕릉의 경우 대부분 자연과의 조화로움과 당대의 철학이나 예술이 집대성된 반면 고양의 공양왕릉처럼 이러한 범주에서 벗어나는 왕릉도 있어 눈길을 끕니다. 분명 이름만 보면 같은 왕릉이지만, 외형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소나무가 있음에도 공양왕릉의 경우 어쩐지 웅장한 느낌보다는 쓸쓸함과 적막감으로 주고 있는데, 현장이 주는 역사의 흔적 역시 한번 생각해볼만한 소재가 아닌가 싶습니다.
공손하게 양위한 왕이라고?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공양왕
예전 사극 <정도전>을 보면서 인물의 묘사와 상황이 너무나 잘 고증이 되어 감탄을 하면서 본 적이 있습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가장 눈여겨본 인물이 바로 공양왕인데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떠올리면 그 동안 실권은 없고, 나약한 인물로 그려졌습니다. 이를 반영하듯 공양왕의 이름 역시 공손하게 양위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니, 고려의 마지막 왕의 이름치고는 참 비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양왕릉의 전경
공양왕릉의 묘표와 상석, 문인석 등의 석물
하지만 실상 공양왕은 왕조를 지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인물로, 최근 <정도전>에서 남성진 씨가 역을 맡았던 공양왕의 모습은 공양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줍니다. 사실상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의 왕은 허수아비로 전락한 가운데 실권은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일파에 있었고, 이러한 가운데 공양왕은 신진사대부 중 정몽주와 이색, 이숭인 등의 온건파를 중용하며, 정도전, 남은, 조준 등의 급진파를 견제하고자 했습니다. 실제 정몽주는 1404년 해주에서 이성계가 낙마하며 부상을 입자 이를 기회로 급진파를 탄핵, 정국의 변화를 꾀했습니다.
안내문에서 바라본 공양왕릉
또 다른 안내문, 왕이 되기 싫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이성계의 부상이 심하지 않았고, 이내 개경으로 돌아오며 결과적으로 실패로 귀결됩니다. 또한 군사력 역시 이성계 일파에게 있었기에 사실상 힘으로 밀어붙이면 고려의 멸망은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몽주의 피살이 결정타가 되어 결국 왕대비 안씨의 전교를 통해 공양왕은 폐위되어, 원주를 거쳐 삼척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이후 조선 건국 뒤 공양왕과 그의 아들들은 삼척에서 피살이 되며 그렇게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생을 마감하게 된 것입니다.
왕릉골에 조성된 고양 공양왕릉, 쓸쓸하면서 적막한 왕릉의 풍경
그런데 공양왕릉은 고양뿐만 아니라 삼척에도 있는데요. 이는 공양왕이 삼척에서 피살되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조선에서 인정한 왕릉은 고양의 공양왕릉으로, 분명 피살된 곳은 삼척인데, 왜 고양에 공양왕릉이 있는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최초 삼척에 조성된 공양왕릉이 훗날 고양으로 이장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요. 반면 고양시 식사동의 지명을 보면 개경에서 고양으로 도망친 공양왕을 위해 스님들이 밥을 해주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공양왕과 순비 노씨가 자결했다고 알려진 호수, 그런데 지금은 규모가 웅덩이에 불과하다.
왕릉에 세워진 석수, 보는 사람에 따라 삽살개로 보는 견해도 있다.
따라서 공양왕릉과 관련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고, 실제 두 곳의 왕릉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비극적인 공양왕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공양왕릉에는 동물 형태의 석수가 세워져 있는데요. 보는 사람에 따라 삽살개, 사자, 호랑이 등 다양하게 보고 있습니다. 삽살개라고 보는 쪽에서는 식사동 전설에서 왕릉 앞 호수에 자결한 공양왕과 순비 노씨의 시신을 찾아낸 것이 삽살개로 나오기에 삽살개가 아닌가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참고로 이때 찾아낸 시신을 바로 옆에 안장하니 현재의 고양 공양왕릉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배면에서 바라본 공양왕릉
소나무 숲과 공양왕릉, 왕릉치고는 참 초라하다는 느낌을 주는, 그래서 고려의 마지막 왕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왕릉이라고 하기에는 초라한 공양왕릉, 특히 소나무 숲 사이로 바라본 공양왕릉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쓸쓸하면서 적막한 느낌마저 드는 그런 곳인데요. 역사의 현장이 주는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어떻게 보셨나요? 흔히 우리는 처음과 마지막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고려의 마지막 왕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공양왕과 이러한 공양왕릉을 한번 주목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 고양 공양왕릉
주소 :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65-6
전화 : 031-909-9000
관람료 : 무료
편의시설 : 화장실 있음, 주차장 협소
'Forest 소셜 기자단 - > 2019년(10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해 마을숲, 물건리 방조어부림에서 숲과 바다를 느끼다 (0) | 2019.06.18 |
---|---|
국가산림문화자산 금강 발원지 ‘뜬봉샘’ (0) | 2019.06.17 |
나침반도 무력화하는 기(氣)센 곳, 청산도 보적산 범바위 (0) | 2019.06.12 |
금강소나무 숲의 웅장함을 느끼는 대관령자연휴양림 (0) | 2019.06.11 |
바다와 섬이 보이는 전망 좋은 꽃동산, 옥구공원 (0) | 2019.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