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est 소셜 기자단 -/2019년(10기)

화성 구봉산, 고대 중국과의 교류의 역사를 간직한 화성 당성 :: 화성 가볼만한 곳

대한민국 산림청 2019. 6. 28. 14:30


하늘을 드리운 은행나무, 가을에 오면 노란 잎이 만발한 풍경을 볼 수 있다.




 여러분들은 산이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지금이야 산이라고 하면 등산하기 위한 장소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고대 사회에서 산은 여러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선 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요. 실제 신라나 조선 때 전국의 산 가운데 오악(五岳)이라고 해서 다섯 곳의 산을 지정해 사당을 세우고, 국가차원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또한 지방에서도 지역의 중요한 진산(鎭山)에서도 이 같은 신앙의 형태가 나타나는데요. 실제 지금도 구례 화엄사를 방문하면, 지리산의 산신에게 제사를 지낸 남악사(南岳祠)가 남아 있고, 계룡산 자락의 신원사에는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중악단(中嶽壇)이 남아 있습니다.


화성 당성으로 가는 길, 좌우로 은행나무가 등산객을 맞이해준다.


 구례 화엄사로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남악사, 산신에게 제사를 지낸 신앙의 단면을 볼 수 있다.



또 다른 시각에서 산은 곧 국토의 방어를 위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인데요. 지금도 많은 산의 정상 부근에서 성의 흔적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산악지형이 많다 보니, 이러한 특징이 잘 보이는데요. 보통 나라의 수도는 평지와 산성이 함께 결합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쉽게 고구려 “국내성=환도산성”, 신라 “반월성=명활산성” 백제 “사비성(부여 나성)=부소산성”의 특징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방어의 측면에서 이러한 성의 흔적은 산에 남겨진 우리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성 당성으로 올라가는 길에 세워진 ‘당성사적비’, 남양 홍씨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화성 당성, 사진으로 보이는 성벽은 2차 성벽으로,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세워졌다.



마지막으로 산은 곧 백성들에게 있어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다고 할 수 있는데요. 실제 과거의 의, 식, 주 가운데 주(住), 즉 집을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무가 필요했고, 또한 산에서 채취되는 임산물이나 산에 서식하는 호랑이나 멧돼지 등의 동물들이 있었기에 산은 풍요로움의 상징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국의 치열한 항쟁과 중국과의 교류를 엿볼 수 있는 화성 당성

이런 의미에서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위치한 구봉산은 여러모로 의미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산인데요. 위치나 크기로만 보자면 일반적인 산과 다를 바 없지만 이 산에 남겨진 역사의 흔적을 이해할 때 구봉산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다르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선 위치적인 특성을 보면 구봉산은 바닷길이 갈라지는 것으로 유명한 제부도로 가는 길에 위치하고 있는데요. 



구봉산 정상에서 모습, 가운데 V자 형태로 훼손된 곳이 형도로, 맞은편의 해운산과 함께 봉수대가 있었던 곳이다.


당성에서 바라본 와룡산, 산의 정상에 화량진성이 위치하고 있다. 예전에는 당성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산 정상에 오르면 서해가 한눈에 조망이 됩니다. 그런데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거에는 구봉산 아래까지 바다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지형적인 특징은 구봉산 정상에 있는 화성 당성(사적 제217호)을 통해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요. 화성 당성이라고 하면 낯설게 느껴지지만 우리 역사에 ‘당항성(黨項城)’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는 곳입니다. 당항성은 신라가 쌓은 성으로, 시기적으로 보면 진흥왕의 북진 이후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1차 성벽, 지난 발굴조사를 통해 땅 속에 묻혀 있던 성벽이 확인되었다.

1차 성벽이 있는 곳에서 확인되는 장방형 건물지



보통 국사 시간 때 배운 한강 유역 쟁탈전에서 마지막으로 장악했던 신라가 지금의 구봉산에 당항성을 쌓은 것인데요. 왜 이곳에 성을 쌓았을까 생각해보면 크게 중국과의 교통로이면서 동시에 지정학적 요충지에 해당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당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왜 등의 압박으로 신라를 도와줄 유일한 세력인 중국과의 교통로를 사수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따라서 신라에게 있어 당항성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는 곳이었던 셈입니다. 


구봉산의 정상, 망해루지의 전경, 예전에는 나무가 꽤 울창하게 있었다. 

구봉산 아래 옛 성벽과 복원한 성벽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실제 <삼국사기>와 <신당서> 등을 보면 642년 8월 백제와 고구려가 당항성을 빼앗으려는 시도하자 이에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해 구원을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당나라에서 사신을 파견해 이를 중재하기도 했는데요. 그 만큼 당시 신라에서 당항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당항성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바로 구봉산으로, 산에 담긴 역사의 흔적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확인해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발굴조사를 통해 실체가 드러나고 있는 화성 당성, 구봉산을 주목해보자!

이러한 화성 당성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었는데요. 대표적으로 당(唐)명 기와, 한산(漢山)명 기와, 본피모(本彼謨)명 기와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3차 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당이 새겨진 기와는 당항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며, 한산의 경우 고구려 때 한산으로 불렸다는 점, 본피모의 경우 신라 6부 중 본피부가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이 모든 것을 종합했을 때 당항성으로 확실시되는 분위기 입니다. 또한 정상에 자리한 망해루지에서는 토제마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이곳에서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가 열렸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실제 바닷가에 인접한 부안 죽막동 유적이나 영암 월출산 유적, 광양 마로산성 등에서 토제마가 출토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지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한산명 기와

북문지로 가는 길에 바라본 구봉산의 정상

역사의 현장을 간직한 구봉산, 화성 당성





화성 당성은 크게 1차 성벽과 2차 성벽으로 구분이 되는데요. 이 중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허리를 감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의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땅 속에 묻혀 있어 눈으로 확인하기는 어려운데요. 반면 지금도 성벽이 드러나 있는 부분은 2차 성벽으로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증축이 된 포곡식 산성의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예전에 비해 정비가 많이 이루어져, 구봉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 나쁘지가 않은데요. 성벽을 따라 걷다 멀리 서해를 바라보면 왠지 예전 ‘당은포’를 비롯한 여러 포구로 드나들던 선박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현재 6차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화성 당성

실크로드 원정대 기념비

산에서 만날 수 있는 알록달록한 꽃 색깔, 이 여름 구봉산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실제 화성 당성의 입구에는 지난 2013년 경상북도에서 세운 실크로드 원정대 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교류의 측면에서 화성 당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불교의 유명한 고승인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로 유학갈 때 떠나던 루트 역시 당항성이었다는 점은 이곳이 가지는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어떻게 보셨나요? 화성 당성이 위치한 구봉산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시각이 아닌 당시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한데요. 산행하기 좋은 계절, 우리 역사의 중요한 한 장면을 품고 있는 역사의 현장인 화성 당성과 구봉산으로 한번 떠나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구봉산(=화성 당성)

주소 : 경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산32
편의시설 : 주차장 있음, 간이 화장실 있음






※ 본 기사는 산림청 전문필진 김희태 기자님 글입니다. 콘텐츠의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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