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좋아하는 시 가운데 나태주 시인의 <풀꽃>과 김춘수 시인의 <꽃>이 있습니다. 해당 시들은 서정적이면서, 동시에 외우기도 어렵지 않아 쉽게 읽히는 경험을 할 수 있는데요. 같은 꽃을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과 함께 모두 ‘관심’이라는 키워드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꽃이 된 것처럼 우리 주변의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상징을 부여한다면 아마 그 때 보이는 우리 주변의 모습은 전혀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고양 대자동에 자리한 연산군 시대 금표비
때문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나오는데요. 같은 장소를 보더라도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건 누구나 한번쯤 해본 경험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바라보면 우리 주변에서 그냥 무심코 지나치는 요소들 중 의외로 생각해볼만한 것들이 제법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데요. 특히 나무의 역사를 다룬다고 해서, 꼭 나무만 보는 것이 아닌 전체적인 숲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 있다면 이 역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이에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돌과 여기에 새겨진 글자를 통해 역사 속에 등장한 사냥터의 역할에 대해 한번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연산군의 폭정? 사냥터의 금표비로 사용된 연산군 시대 금표비
조선의 왕들 가운데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물이라면 단연 연산군을 들 수 있는데요. 흔히 연산군의 시대를 떠올리면 견제 받지 않은 권력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선 연산군의 시대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경연(經筵)이나 언론기관인 사간원(司諫院)을 폐지한 것인데요. 이걸 보면 학문이나 언론 등에 대한 연산군의 시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해당 시기는 사화(士禍)의 시대가 시작되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던 이른바 광기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연산군의 폭정을 잘 보여주는 문화재가 있어 눈길을 끄는데요. 바로 고양시 대자동에 위치한 연산군 시대 금표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88호)입니다. 그런데 해당 금표비가 세워진 이유를 보면 기가 막힌 데요. 바로 사냥을 좋아했던 연산군이 사냥터를 확대하기 위해 유흥지로 설정, 강제로 민가를 철거시켰던 것입니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자리한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 폐위되었기에 왕릉이 아닌 묘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연산군 시대 금표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사냥에 대한 연산군의 집착을 엿볼 수 있다.
여러분들은 사냥터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아마 사슴이나 맹수들 사이로, 활이나 기타 도구를 이용해 동물들을 사냥하는 이미지가 연상이 되실 텐데요. 이러한 행위 자체는 하나의 군사훈련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따라서 사냥 자체는 역대 제왕들도 했던 행위로, 행위 그 자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연산군의 경우 사냥에 대한 집착이 과도했다는 점인데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사냥터를 조성하기 위해 민가를 철거 시키고, 여기에 금표비를 세워 출입을 금지하게 됩니다. 졸지에 집을 잃고 쫓겨나야 했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원성을 살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면에서 바라본 연산군 시대 금표비의 전경
측면에서 바라본 연산군 시대 금표비
강화 교동도에 위치한 연산군 유배지, 폭군의 말로를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이다.
앞전에 소개한 것처럼 금표비의 경우 능이나 태실을 조성할 때 세우는 것을 볼 수 있었지만, 사냥터를 조성하기 위해서 민가를 철거하고, 금표비를 세운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금표비 앞면을 보면 ‘금표내범입자논기훼제서율처참(禁標內犯入者論棄毁制書律處斬)’을 새겨 넣었는데요. 말 그대로 금표 지역을 무단으로 침입한 자는 기훼제서율에 따라 참형에 처한다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단순히 출입을 했다고, 참형이라~ 정말 아찔한 내용인데요. 그렇다면 이러한 금표는 엄격하게 시행이 되었을까요? 답은 힘이 있는 자에겐 너그럽고, 힘이 없는 백성들에게는 가혹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즉 조정이나 왕실의 힘이 있는 인사의 경우 금표에서 제외되는 사례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피해를 보는 건 백성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금표비의 존재는 연산군 시대의 폭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재로, 당시의 흔적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가 됩니다.
천안 독립기념관에 자리한 무용총 벽화 모형, 고구려 벽화 중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수렵도’를 볼 수 있다.
고구려 기마무사상의 전경, 충주휴게소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사냥이나 사냥터 자체를 나쁘게 볼 필요는 없는데요. 지금도 천안 독립기념관을 방문해보면 무용총의 벽화 모형을 볼 수 있는데요. 이곳에 있는 벽화 중 유명한 것이 바로 ‘수렵도’입니다. 벽화 속 그림 자체는 사냥 연습을 하는 모습이지만, 상무정신이 투철했던 고구려에서는 이러한 사냥이 신분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데요. <삼국사기> 온달전을 보면 바보로 불리던 온달이 두각을 드러낸 것은 매년 3월 3일 낙랑 언덕에서 진행되는 사냥대회로, 여기에서 두각을 드러낸 온달은 이후 후주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대형(大兄)의 벼슬을 받는 등 신분 상승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냥터에 대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연산군 시대 금표비
따라서 사냥이나 사냥터 자체는 그리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를 어떻게 활용하는지에 따라 역사 속 평가가 달라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셨나요? 그저 돌에 새겨진 글자에 불과하지만, 연산군 시대 금표비를 통해 과거 사냥터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고, 해당 시대를 조명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데요. 고양을 방문할 기회가 있으시다면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연산군 시대 금표비를 주목해보셔도 좋습니다.
* 고양 연산군 시대 금표비
주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10-1
편의시설 : 주차 공간 협소, 화장실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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