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남 하동 지리산 둘레길 13코스 원부춘마을~입석마을까지 -
산림청 블로그 일반인 기자단 김종신
배낭 양옆에는 막걸리 2병이 꽂혀 있었다. 배낭은 가로줄 무늬 반소매 셔츠를 입은 스물다섯의 청춘이 매고 있었다. 10월 16일 직장 MT로 경남 하동군 지리산 둘레길 13코스 출발지인 원부춘마을에 도착했을 때 직장에서 가장 젊은 동료의 옷차림새다. 마을 회관 앞 누렁이는 동료들이 심심풀이로 던져주는 김밥을 날름날름 받아먹기 바빴다. 모두 약간은 들뜬 표정 속에서 산을 올랐다. 회관 앞 빨간 석류 한 알이 파란 하늘에 더욱 빛내며 길 떠나는 우리를 배웅했다. 마을을 벗어나기도 전에 솜사탕처럼 복스러운 꽃향유가 저기 한 무더기, 여기 한 무더기 보랏빛으로 한들거렸다. 꽃향유 너머로 빈 병들이 널브러져 있다. 청주 대병도 여럿 있는 것이 지난 추석 때를 떠올리게 한다. 차례 지내고 온 가족 모여 청주로 음복했으리라. 청주 대병의 흔적을 뒤로하자 집 한 채 없는 마을 끝자락에 이르렀다.
본격적으로 산에 올라갈 때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나 하나쯤이야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나는 밤, 감, 과실과 농작물은 지역주민들의 땀과 노력의 결실입니다. 나부터 먼저 지켜주세요.’ 지리산 둘레길 13코스는 하동군 화개면 원부춘마을과 악양면 대축마을을 잇는 8.6km 길이다. 우리는 악양면 입석마을까지로 길을 잡았다. 본격적으로 산에 올라갈 때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나 하나쯤이야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나는 밤, 감, 과실과 농작물은 지역주민들의 땀과 노력의 결실입니다. 나부터 먼저 지켜주세요.’ 현수막 바탕 그림 속의 할머니 두 눈이 또렷하다. 그림 속 할머니는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듯 두 눈 또렷하게 오르내리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산으로 올라가자 오른편으로 농사용으로 사용하는 모노레일이 보였다. 저 모노레일로 깊은 산 속 밤을 비롯해 임산물을 수확한다.
경남 하동 조운사 미스 부처님처럼 두 눈이 다 감기도록 순박하게 웃는 얼굴에서 기운을 얻었다.
마을을 떠난 지 10여 분 지났을까. 조운사라는 절이 나타났다. 절 담벼락에 그림이 있다. 떡두꺼비 같은 부처님이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오르는 우리에게 방긋 웃는다. 미스터 부처님이 아니라 미스 부처님처럼 두 눈이 다 감기도록 순박하게 웃는 얼굴에서 기운을 얻었다. 작은 시내 바닥을 두드리며 흐르는 물소리가 시원하다. 시원한 물소리에도 가파른 산의 경사만큼 우리는 가파른 숨을 내쉬었다. 간격이 벌어졌다. 평소에 운동해야지 하는 다짐을 새로 할 무렵 컴컴한 대나무 숲길이 나왔다. 한낮의 햇살이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의 시원한 그늘이 좋았다.
한낮의 햇살이 들어오지 않아 컴컴한 대나무 숲길.
양팔에 스틱을 집고 돌계단을 오르는 동료가 많다. 산은 가팔랐다. 둘레길이 아니라 완전히 등산이다. 돌계단을 오르면서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없다. 무념무상의 길이다. 잡념이 없다. 얼마나 남았을까 물어볼까 싶지만 물어보기도 귀찮다. 산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조금만 더,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에 얼마나 많이 속았는지 알기 때문이다.
날다람쥐처럼 빨리 올라가는 동료의 뒤꽁무니를 쫓으려 애썼다. 빨간 운동복 차림으로 올라가는 젊은 날다람쥐 뒤꽁무니만 쫓았다. 그렇지만 실룩거리는 엉덩이도 이제 보이지 않는다. 뒤를 돌아보니 그래도 히말라야 산이라도 오를 듯 단디(단단히) 챙겨 입은 동료들이 그래도 뒤에 기차처럼 따라온다. 이마에 연신 흘러내리는 땀 사이로 바람이 분다. 손수건으로 닦아도 닦아도 흘러내리는 땀은 멈추지 않는다. 햇살이 초록 잎에 맺혔다. 땀 한 번 훔치고 초록 햇살 바라보고, 땀 한 번 훔치고 푸른 하늘 한 점 보았다.
‘오매 단풍 들것네’라는 시 구절이 그립지만, 단풍은 아직 철이 아니다. 저만큼 붉은 단풍잎으로 가을 멋을 낸 나무가 가을임을 느끼게 한다. 갑자기 내 앞에서 걷던 아줌마 동료들이 시끌벅적하다.
“이것으로 김치 담그면 좋겠다.”
“아냐 아냐 밀가루에 버무려 개덕장 부쳐 먹었으면···.”
“시원한 동동주와 함께.”
계피나무를 보고 저마다 한마디씩 하는 통에 입가에 침이 고였다. 이마에 흐르는 땀 닦으랴, 입가에 고인 침 닦으랴 나도 바빴다. 돌계단은 보이지 않았다. 가파른 산도 이제 지칠 무렵 주막이 나왔다. 시원한 동동주에 지짐을 부쳐 먹자 했던 동료들이 배낭 속에 가져간 족발을 끄집어내고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가을바람 솔솔 불어왔다. 소나무 아래에서 막걸리 한 잔이 주는 여행의 운치다. 산속에 주막이 금세 만들어진 셈이다. 된장에 족발 한 입, 막걸리 한잔 들이키는 사이로 가파른 돌계단을 끝냈다. 정오 무렵의 햇살도 무색하게 짙은 그늘 속에서 하늘이 조금씩 보이고 초록 잎이 더욱 빛나는 길에 이르렀다. 1시간 30여 분 걸었다. 이정표가 내 지나온 길을 알려준다. 모두 앉아 김밥으로 배를 채우고 막걸리로 마음을 채웠다.
오후 햇살이 숲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오직 붉나무의 붉은 잎이 더욱 붉게 보란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속에서 먹는 맛은 내가 흘린 땀방울만큼 맛났다. 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한번 두 번 세 번 쉼 없이 올라왔다. 그런 사이로 노란 이고들빼기가 발아래에서 빛났다. 이고들빼기의 노란 빛이 좋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나무에 가려 푸른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오후 햇살이 숲 전체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오직 붉나무의 붉은 잎이 더욱 붉게 보란 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촉감 좋은 낙엽 사이로 햇살도 들지 않는다. 어둑어둑한 숲길. 바스락바스락. 마른 나뭇잎이 온몸으로 내는 경쾌한 소리가 좋다. 가만히 귀 기울여 다시금 듣는다. 가을만이 들려주는 행복한 소리다.
올라오는 길만큼 내려가는 길도 가파르다. 돌계단이 여기저기. 올라올 때와 달리 능선을 타거나 내려가는 길은 거침이 없었다. 저만치에서 바라보는 섬진강 물줄기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모두 자신의 휴대폰으로 풍경을 담기 바빴다. 얇게 오르고 내리는 길을 지나자 푹신한 낙엽이 함께 한다. 촉감 좋은 낙엽 사이로 햇살도 들지 않는다. 어둑어둑한 숲길. 바스락바스락. 마른 나뭇잎이 온몸으로 내는 경쾌한 소리가 좋다. 가만히 귀 기울여 다시금 듣는다. 가을만이 들려주는 행복한 소리다.
“바스락바스락” 마른 나뭇잎 소리를 들으며 느긋한 발길을 재촉했다. 하얀 쑥부쟁이들이 나왔다. 하얀 쑥부쟁이 꽃동산은 가을날의 수채화를 그리고 있었다. 내가 몰래 비밀의 정원에 들어온 양 설렜다. 쑥부쟁이들의 하얀 물결이 끝나자 걷기 시작한 마을에서 본 꽃향유들이 그늘진 언덕에 보랏빛 밭을 이루고 반긴다. 반가운 마음에 꽃향유 앞에서 기념사진 한 컷 남겼다. 기념사진 뒤로 마을 이정표가 나온다. 이정표부터는 흙이 아니라 시멘트다. 마을이 가까울수록 대봉 감이 더 탐스럽다. 여기저기 대봉 감이다. 대봉 감으로 유명한 동네답게 대봉 감이 노란 빛깔에서 빨간 빛깔로 익어가고 있었다.
마을이 가까울 무렵 저만치 두 어르신이 깨를 사륜 오토바이에 힘겹게 싣고 계셨다. 무게는 얼마 되지 않지만 앙상한 두 어르신의 몸에 비해 부피가 여간 아닌 깨를 오토바이에 옮겨드렸다. 고맙다는 할아버지 연세는 80이 넘으셨다. 할머니는 안사돈이란다. 안사돈 혼자 깨를 수확해 옮기는 게 안쓰러워 지나가다 옮겨드린다고 나선 것이란다.
소설 <토지>의 무대 최참판댁이 있는 악양 들판과 부부 소나무.
깨를 싣고 내려가는 사륜오토바이 사이로 부부 소나무가 노란 들판에서 보였다. 소설 <토지>의 무대 최참판댁이 있는 악양 들판이다. 하늘 향해 나팔 부는 유홍초의 주황색이 도드라지게 빛나자 집들이 하나둘 나왔다. 마을 안길은 흙 하나 없는 시멘트 길이었다. 그럼에도 시멘트 길과 시멘트 담벼락 사이로 붉은 닭벼슬을 닮은 맨드라미가 피었다. 슬래브집에 형제봉 주막이라는 가게가 나왔다. 구멍가게 같은 주막 한쪽에 세워진 나무 현판에 새긴 ‘바람에 실려’라는 말이 정겹다.
옷자락을 흔들며 지나가던 바람이 그려낸 풍경으로 들어간 하루였다.
이 길을 걸을 때 가파른 길을 보고 처음에는 짜증이 났다. 기가 질렸다. 이 둘레길은 분명 어렵다. 각오해야 할 정도로 오르막과 내리막이 가파르다. 하지만 첫발을 떼는 게 힘들 뿐이었다. 조운사에 만난 미스 부처님의 순박한 웃음 한 바가지가 바람과 함께 나를 바람과 함께 넘어왔다. 가을에 만나 풍경은 바람이었다. 옷자락을 흔들며 지나가던 바람이 그려낸 풍경으로 들어간 하루였다.
지리산 둘레길
자연과 사람을 이어주는 지리산 둘레길은 3개도(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와 5개 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21개 읍면, 120여 개 마을을 이어주는 총연장 285km의 걷는 길이다.
13코스인 원부춘~대축마을 구간은 8.6km로 4~5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난이도가 중·상이다. 원부춘-묵답(0.99km)-너럭바우(2.3km)-아랫재(0.22km)-개서어나무숲(0.54km)-입석(2.3km)-악양천뚝길(1.9km)-대축마을(0.23km).
원부춘~대축마을에서 주요 가볼 곳은 소설<토지>의 주 무대를 재현한 최참판댁과 고소산성, 매암차 박물관, 악양 들판의 부부 소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