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산림청/Magazine 숲

<산 그리고 사람> 버리고 탐하지 않으며 자연이 되겠다 시인 나태주

대한민국 산림청 2017. 6. 22. 16:30

<산 그리고 사람>

버리고 탐하지 않으며

자연이 되겠다 시인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아주 짧지만 매우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지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 광화문 광장에 시인의 시가 걸리기 시작하며, 많은 사람이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에 위로받고 용기를 얻었다. 그의 시로부터 위로받은 한 사람으로서 나태주 시인을 만났다. 강연으로 눈코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그는 직접 호미와 삽을 들고 풀꽃문학관을 살뜰히 보살피고 있었다.





 자세히 보아야 알게 되는 것


풀꽃은 대중에게 나태주란 이름을 새기게 한 대표작이다. 그의 시 풀꽃은 2012년 교보생명 광화문 글판에 내걸리면서 대중에게 인기를 얻었다. 시민들에게 가장 사랑받은 글판으로 꼽히기도 했다. 쉽고 간명해 한두 번 주억거리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게 한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따듯한 위로를 받는다. 위로는 사실 그리 길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나태주의 시를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풀꽃은 아이들에게 받은 선물이에요. 교직 생활할 때 아이들이 그린 그림에 소감을 적은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이들이 제게 준 선물이나 다름이 없죠. 사람들이 그런 저에게 ‘풀꽃 시인’이라 이름 지어주기도 했어요. 많은 곳에서 문학 강연을 청해오기도 해요. 한 편의 작품이 이렇게 큰 파문을 몰고 왔다는 생각에 깜짝깜짝 놀라곤 해요.”


풀꽃은 한 종류의 꽃을 의미하지 않는다. 풀 사이에 끼어 자라고 피는 꽃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러하니 시인의 시 구절처럼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지 못하게 된다. 세상에 의미 없는 것들이 없는 것처럼, 의미 없이 자라는 풀꽃 또한 없다. 인터뷰는 풀꽃문학관 앞뜰에서 진행됐다.


그 덕에 시인은 앞뜰에 핀 풀꽃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는 밥보재를 가리켰다.


“사람들이 밥보재를 왜 안 뽑냐고 해요. 밥보재는 그야말로 잡초죠. 하지만 자세히 보세요. 노란 꽃이 피어있어요.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제일 먼저 통성명을 해요. 상대의 이름을 알게 되면 우리는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죠. 우리가 저 풀꽃의 이름 밥보재를 안 순간, 우리는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되는 거죠. 그런 밥보재를 어떻게 뽑을 수 있겠어요.”


오랫동안 풀꽃을 자세히 바라보온 시인은 풀꽃 연작시를 지었다.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 아, 이것은 비밀(풀꽃 2)’ 시를 짓고 난 후 시인은 곰곰이 생각했다. 자세히 응시하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다름 아닌 그려보기다. 그래서 시인은 시뿐만 아니라 풀꽃을 그려 시화집도 냈다. 문학관에는 그의 맑은 영혼이 담아낸 시화가 걸려있었다.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시인이 담아낸, 순수하고 맑은 동심이었다.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라 만족이다


서천에서 나고 자란 시인은 공주사범학교에 입학한 후 공주가 좋아 줄곧 공주에서 살았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64년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됐고 2007년 공주 장기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교단에서 물러났다. 교단에서 물러난 후 그의 삶은 더욱 바빠졌다. 2014년 시 풀꽃을 기념해 공주에서는 풀꽃문학관을 건립했고 이와 동시에 시인은 관장을 지냈다. 관장을 지내면서 한 해 200여 건이 넘는 강연을 소화하는 등 여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도 그는 자동차 하나 굴리지 않으며 바쁜 일정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여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자연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인간의 자연 법칙을 따르기 위한 ‘자발적 고독’이다.


“운전면허가 없어요. 엄청난 자연보호가라서가 아니에요. 단지 내 자신이 자연에 빌붙어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 때문이에요. 나 자신이 곧 자연이고 환경이죠. 자연(自然)이 가진 의미도 그러하죠. ‘스스로 그러하다’ 곧, 스스로 자신처럼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자연인 것이죠.”


스스로 바닥이 되는 것이 자연이고 스스로 관계를 맺는 것이 비로소 자연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생동하는 자연을 멀리하는 현대인이 그는 안타깝기만 하다.




“오늘날 현대인은 여러 정신질환을 겪어요. 자연을 멀리해서 그렇죠. 여기에 앉아 바람을 맞아 보세요. 신록으로부터 스쳐 내려온 바람이 에요. 바람과 잎이 부딪히면 파도 소리가 난다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아요. 나무와 풀과 바람처럼 살면 얼마나 좋겠어요. 자연처럼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해요. 우리는 모두 자발적으로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소외시켰습니다. 방법은 달리 없어요. 자발적으로 소외했으니 자발적으로 귀환해야 하죠. 친근을 도모해야 합니다. 자연, 스스로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야 하죠.”


그렇기에 시인은 많은 것을 내려놓고 살았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다 짊어지고 살아서는 자연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래서 그는 집에 대한 욕심을 옷에 대한 소유욕을 먹는 것에 대한 탐을 던져버렸다. 아예 안 먹고 안 입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되는대로 살아가는, 그야말로 ‘자발적인 무욕’이다.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라 만족이라고 했다. 만족을 알고 멈출 줄 알아야 사랑이 가능하다.


내가 만족감을 느끼고 산다면 어떤 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얼굴에는 자연이 인간에게 내어주는 평온함, 자유로움이 묻어 있는 듯했다. 스스로 자연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시인, 그래서 스스로 탐욕을 버리고 무욕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시인. 어쩌면 그의 시가 자연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소외된 인간을 위한 자연이지 않을까. 그가 깊고 낮게 읊조리는 자연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어떻게 우리를 위로해줄까. 그의 자연이 궁금해졌다.



※ 본 콘텐츠는 산림청 격월간지 '매거진 숲'에서 발췌한 기사입니다.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내손안의_산림청,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