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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에 살어리랏다! 귀산촌 이야기> 마당이 있는 삶을 꿈꾸다! ①

대한민국 산림청 2017. 9. 27. 09:30


성공 귀산촌人 - 김미진씨


 울산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김미진씨는 2004년 1월 모임의 수련회에 따라나섰다가 소호마을에 처음 왔다. 마을을 산책하다 들른 소호분교 운동장 가운데 우뚝 선 느티나무를 보고, 이런 학교에 아이가 다니면 행복하겠단 생각을 했다.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그날 남편과 합의를 보고 2월에 남편 먼저 아이와 함께 소호마을로 이사를 했다. 그녀나 남편이나 한 번도 시골생활을 꿈꾸거나 계획한 적이 없는 상태였다. 시골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하면서 남편이 먼저 회사를 그만뒀고 그녀 역시 6년 만에 교사직을 미련 없이 버렸다. 폐교 위기에 몰린 소호분교를 살리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 소호산촌유학센터가 설립되었다. 2011년 미진씨가 처음으로 도시에서 온 유학생 2명을 받아 홈스테이에 참여했다. 점점 유학센터 일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고 귀촌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2009년 9명이었던 소호분교의 학생수가 2016년 현재 45명이다. 2013년에는 야생차를 만들어 판매하는 소호산촌협동조합 설립에도 참여했다. 관광객도 늘고 일자리도 창출했다. 그러나 위기는 다시 찾아올 것이다. 소호분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나간 아이들이 결혼해서 마을로 돌아오길 바란다. 소호마을에서 십년 넘게 셋집을 전전하던 그녀는 이제 집도 마련했고, 경제적 안정도 얻었다. 소호마을에서 원주민과 갈등도 겪었고, 새로 들어온 사람들과 충돌하기도 했지만 후회 없다. 인생이 재밌으니까.






 분교 운동장의 느티나무 한 그루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소호리 소호마을은 지금 울산, 부산 일대 도시민들에게 귀촌 지역으로 인기가 높아지면서 지가가 오르고 빈집은커녕 셋집도 구하기 어렵다. 운문-가지산으로 일컬어지는 영남알프스의 한 자락에 위치한, 해발 5 백미터에 이르는 산간 오지마을이 인기를 끈 까닭은 아무래도 도시와의 거리가 가깝지만 청정한 자연환경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 12년 전 놀러 왔다가 한 달 만에 이사를 온 김미진씨. 그녀는 소호마을에 처음 와 보고 한 순간에 마음이 사로잡혀서 이사를 했다. 그녀의 감정을 사로잡았던 것은 초등학교 분교 운동장에 있는 나무 한그루였다. 수령 4백년이 넘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작은 운동장 가운데 늠름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운동장과 나무. 어쩌면 그녀는 마당이 있는 삶, 삶의 여백이나 공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문밖이 곧장 길이었던 삶에서 느티나무가 있는 운동장에 서서 ‘이곳에서 아이를 키워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가 2004년 1월이었고 세를 얻어 이사를 온 것이 2월이었다. 그리고 큰 아이가 3월에 소호분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지금은 사라진 ‘평등사회를 여는 울산여성회’ 활동을 하던 김씨는 여성회 수련회로 소호마을을 방문했다. 회원인 유영순씨가 자신이 귀촌해 사는 마을로 초대한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놀러와 마을을 둘러보며 운동장에서 느티나무를 보기 전까지 그녀는 단 한번도 귀촌이나 시골생활을 상상도 해 본적이 없었다. 도시에서 태어났고, 자랐고, 교사 생활을 하면서 결혼도 했다. 아파트에 살았고 직장생활에 대한 불만도 없었다. 즐겁고 행복했고 전원생활을 동경할 계기도 없었다.





“학교에 갔는데 운동장에 있는 나무가 멋있었어요. 이런 학교에 다니면 애가 행복할 것 같고 그럼 나도 행복할 거라 생각했죠.”


운동장의 나무 한그루 보고 들어왔단다. 단순하다. 이보다 단순할 수 없다. 운동장에서 나무를 처음 본 그날 돌아가서 남편과 상의를 했단다. “됐나?” “됐다.” 남편과는 정치적인 문제나 아이들 교육에 관한 문제로 갈등도 없었고, 어떤 문제를 처리하는데 별로 고민하지 않고 덥석 처리하는 유형이라 바로 주말에 남편이 소호마을로 왔다. 폐가를 얻어 수리를 해서 입주한 데 걸린 시간이 한 달 남짓이다. 남편과 초등학교 입학할 큰 아이가 먼저 이사를 했고, 김씨는 아파트 처분을 위해 몇 달 더 둘째 아이와 울산에 머물렀을 뿐이다. 그때 그녀 나이 34세였다.


그녀의 남편 역시 시골생활의 경험이 없었다. 소호마을에 들어와서도 그녀는 여전히 울산으로 출근을 했고, 그녀 남편 역시 울산으로 출근했다. 출퇴근에 왕복 2시간이 걸렸다. 월급을 안 받으면 굶어죽는 줄 알았다. 그래서 당연히 직장을 다녔다. 그런데 먼저 직장을 그만 둔 것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5시 칼 퇴근을 하는 그녀에 비해 남편은 퇴근시간이 늦어지면서 출퇴근을 힘들어했다.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끼는 듯도 했다. 직장을 그만둔 남편은 한동안 전업주부로 지내더니 이내 산촌생활에 적응을 하면서 산촌형 비정규직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임도관리, 산불예방활동 등 면에서 나오는 6개월 혹은 10개월짜리 일을 하면서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월급 없어도 살겠다싶어 학교 사표


소호마을로 오고 나선 간혹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 있어도 아이들 걱정이 되지 않았다. 아파트에 살 땐 항상 문을 잠그고 있으라고 당부하고 다녔지만 여긴 걸어 잠글 대문도 없었다. 동네가 작고 빤하니까 걱정할 일이 없었다. 동네의 귀여움도 독차지했다. 먼저 들어온 유영순씨에 이은 2번째 귀촌자인데다 그 후로 6년간 새 귀촌자가 없었던 탓이다. 게다가 아이까지 둘을 데리고 온 학교 교사 새댁이었다.


퇴직한 첫 해 텃밭의 규모를 키웠다. 물론 임대한 밭이다. 지주가 직접 임대를 주지 않아서 이장을 통해서 빌린 것이다. 그래봐야 2 백 평 남짓으로 마을사람들이 볼 때 소꿉장난 수준이었다. 토마토, 방울토마토, 오이, 가지, 고추 등 여러 가지를 심었는데 거름을 하고 나니 마구 크기 시작하는데 감당이 안 되었다. 생활협동조합 같은 곳에 낼 수준도 안 되었고, 어디 팔 곳도 없었다. 지인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전부였다. 하루는 아는 사람이 와서 만원을 주고 간 탓에 그해 농업소득은 만원이 전부였다.


그해 또 이사를 했다. 소를 키우던 이웃 할아버지 집으로 셋집을 옮긴 것이다. 소를 키워주는 조건으로 무상임차였다. 남편은 소를 키워주는 김에 자기도 더 키워 보겠다고 8마리를 샀다. 소를 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구제역이 터졌다. 마을에 직접 피해를 주진 않았지만 전국적으로 소 사육농가들은 벌집을 쑤신 듯 했다. 또 덥석 일을 시작했구나 싶었다. 하지만 퇴각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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