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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에 살어리랏다! 귀산촌 이야기> 마당이 있는 삶을 꿈꾸다! ②

대한민국 산림청 2017. 9. 29. 13:30



성공 귀산촌人 - 김미진씨



 산촌유학 등 마을사업 참여


그 무렵 소호마을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산촌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가 소호마을로 들어온 계기를 만들어 준 유영순씨가 김수환씨와 함께 소호산촌유학센터(cafe.daum.net/soho-sanchon)를 만든 것이다. 그녀가 할배라고 부르는 김수환씨는 울산숲자연학교의 대표로 영남알프스 일대에서 산촌유학을 통해 작은 학교를 살리는 일을 하고 있다.


산촌유학센터 운영은 농가들이 홈스테이 형태로 참여하여 유학생을 받고, 센터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는다. 그 첫 번째 농가로 김미진씨가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아들이 학교에 입학하던 해 소호분교의 학생수는 25명이었는데 6년이 지난 2010년엔 9명까지 줄어들었다. 폐교 위기에 몰린 학교를 되살리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 산촌유학이었던 셈이다.


소호마을의 산촌유학은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그녀도 점점 센터의 일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산촌유학을 통해 소호분교가 폐교위기를 벗어나자 귀촌자들도 늘기 시작했다. 학교의 학생수도 늘었다. 2016년 현재 소호분교의 학생은 45명이다. 그중 12명이 유학생이다. 나머지 순 증가분은 신규 귀촌자들 몫이다.





산촌유학은 유학 온 학생들의 만족도도 높고, 홈스테이하는 농가의 소득도 증가시키고, 학교가 살아나 귀촌자가 증가하면서 마을이 활기를 띠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가져왔다. 중학교가 없는 소호마을이라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유학생이 도시로 돌아가야 하지만, 돌아가지 않고 소호마을 에 머물며 버스 타고 등하교를 하는 중학 유학생도 현재 3명이나 있다. 중학생까지는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학생과 학부모들의 요구를 수용한 결과다. 2013년 마을에 또 하나의 회사가 만들어 졌다. 야생차를 만들어 판매하는 소호산촌협동조합 (cafe.daum.net/sohosanchon)이었다. 


이번에도 시작은 유영순씨 였다. 그녀는 산촌에 들어와 먹고 살기 위해 야생차 만드는 법을 배 웠다. 전국을 다니며 차의 재료를 선별하는 법, 차를 덖는 법을 배워 개인적인 연줄을 통해 차를 판매하고 있었다. 이를 마을 소득사업으로 키우고 싶어 했다. 8가구가 조합원으로 나섰다. 당연 히 그녀도 참여했다. 협동조합을 만들고 차를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뽕잎차, 감잎차, 쑥차, 생강나무꽃차. 목련 꽃차, 두충차, 국화차 등이다. 뽕잎차는 서리 맞은 뽕잎을 주로 썼고 쑥차는 약성이 좋은 단오 이후에 채취했다. 원료는 마을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주변 산과 들에서 채취해 온 것을 수매했다. 협동조합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행정자치부로부터 마을기업으로 지정을 받아 지원도 이끌어냈다. 그러면서 고객도 늘어났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등 관련 공무원들이 소호마을의 야생꽃차를 구매해주고, 홍보요원이 되어주기도 했다.





야생꽃차를 만드는 마을기업이 자리를 잡으며 차 전시판매장은 마을의 카페가 되었고, 관광객들이 꼭 들러 차를 마시며 마을에서 생산하는 사과 등 다른 농산물을 사가는 거점이 되었다. 전시판매장 바로 뒤에 위치한 꽃차를 만드는 시설은 또 하나의 체험거리가 되어 주었다. 조합은 몇 개의 상근, 반상근의 일자리도 창출했다. 지금은 그녀의 남편이 상근 이사장을 맡고 있다. 월급 150만원. 소호마을에 들어온 이후 그녀 부부가 최고의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남편이나 저나 120만 원 이상 번 적이 없어요. 유학생을 받을 때도 그렇고, 산림감시 등 면의 비정규직을 나갈 때도 그 정도였죠. 수입이 적으면 씀씀이를 줄이면 되죠. 시골살림은 씀씀이 줄이는 게 쉽죠. 통신비 등 고정 지출은 어쩔 수 없지만....”




 산골생활이 좋다, 인생이 재밌다


그녀는 스스로를 마을의 땜빵 담당이라고 말한다. 전문적으로 잘 하는 게 없으니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일한다. 몇 해 전 소호마을이 녹색농촌체험휴양마을로 지정이 되어 사업을 시작했을 때 그녀는 사무장을 맡았다. 체험휴양마을 사업을 하면서 마을엔 캠핑장, 세미나실, 숙소 등이 만들어져 관광객이 많은 여름철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얼마 전 체험휴양마을 사무장을 할 만한 사람이 나타나자마자 그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지금은 산촌유학센터의 일만 하고 있다. 산촌유학생도 다른 농가에 넘기고 경상도권에서 산촌유학센터를 준비하는 다른 마을에 도움을 주는 대외활동만 하고 있다. 농촌유학전국협의회에서 외부권역 지원담당이다.





“지금은 귀촌자가 늘어서 소호분교의 학생 수가 많지만 5-6년 후에 다시 위기가 찾아옵니다. 자체재생산이 안됩니다. 결국 산촌유학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요. 울산광역시 전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분교지만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해요. 귀촌자도 점점 은퇴자들 중심이고요. 소호분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나간 아이들이 결혼해서 마을로 돌아오지 않는 한 말이죠. 농담으로 ‘애부터 낳아 보내라’ 합니다.”


그녀가 운동장에 잎 다 떨구고 홀로 선 느티나무 노거수에 매료돼 큰 고민 없이 덥석 일을 저지른 귀촌 12년이다. 과연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후회 없어요. 그냥 도시에서 살았으면 나름대로 살았겠지만 지금처럼 인생이 재밌진 않았을 겁니다. 시골에서 살면 평화롭기만 한 건 아니죠. 원주민들과의 갈등도 겪었고, 이제는 그들을 이해하고 잘 지낼만 하니 또 도시문화 그대로 가지고 새로 들어온 사람들과의 갈등도 겪고 있어요. 이질적인 것이 계속 충돌하는 것이 쉽진 않죠. 하지만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할 것 같아요. 사람이 살아있는 거 같아요. 싸우기도 많이 싸웁니다. 시골에선 막 손가락질 하고 싸우고도 다음날 같이 밥을 먹죠. 좋고 싫고 싸워가면서 살아가는 게 좋아요. 그게 살아있는 게 아닐까 싶네요? 도시에 살 땐 그러질 않았죠. 조심해서 살았죠. 숨죽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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